‘악을 저지르는 자’와 ‘진리를 실천하는 자’: 육체를 살리려는 자와 영혼을 살리려는 자
오늘 복음에도 역시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이 대화의 핵심은 ‘성령으로 새로 남’입니다.
새로 나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이 구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악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은 빛으로 나아옵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악을 저지르는 자’와 ‘진리를 실천하는 자’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누가 악을 저지르는 자이고, 누가 진리를 실천하는 자일까요?
결국, 진리를 실천하는 자는 빛에 머물게 되고 악을 실천하는 자는 어둠 속에 머물게 됩니다.
고양이 ‘준팔이’는 버려진 고양이 보호소에서 석 달 넘게 먹지도 않고 밖으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억지로 음식을 넣어도 토하고 뱉어냅니다.
몸무게는 발견될 당시의 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주인에게 버려졌다는 마음의 병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살려는 의지가 없어서 자발적 거식증에 걸린 것입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먹는 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이때 준팔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뮤지컬 배우 배다해 씨입니다.
“고양이가 밥을 안 먹을 정도면 자기가 죽겠다는 마음을 거의 먹은 상태랑 다름없거든요.
한 명은 널 버렸을지 몰라도 널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다해 씨는 준팔이를 처음 만났을 때 생각보다 더 말라있는 준팔이를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날수록 준팔이는 자신의 몸을 맡기기도 하고 손을 내밀기도 합니다.
몸이 약해서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지만 다해 씨가 와 있을 때는 편안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렇게 지낸 1주일 뒤 준팔이는 스스로 다해 씨를 향해 먼저 다가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먹이는 거부합니다.
목소리를 통해 보지 못할 때도 준팔이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렇게 두 주일이 지나자 준팔이는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삼 개월 만에 처음으로 먹이를 먹게 됩니다.
더 감사한 것은 준팔이가 다른 고양이 친구들과 사람들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처: ‘주인 잃고 단식 중인 고양이, 준팔이’, 유튜브 채널, ‘SBS STORY’]
고양이 보호소에는 버려진 고양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다해 씨의 관심을 끈 것은 준팔이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배다해 씨가 줄 수 있는 것을 찾는 고양이는 준팔이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고양이들은 준팔이의 음식까지 뺏어 먹습니다. 그러나 준팔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사랑이 아니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랑을 찾으니 사랑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것이 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영혼도 살려고 하고 육체도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영혼은 사랑을 먹어야만 살고 육체는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만약 영혼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준팔이처럼 육체를 살리는 데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혹은 육체를 살리려고 하는 자는 하느님 사랑에 관심이 없습니다.
영혼은 하늘에서 온 것이고 육체는 땅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복합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안에는 이미 어떤 긴장이 깃들어 있으며,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 일종의 싸움이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실상 죄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며, 죄의 결과 중의 하나이자, 동시에 죄를 확증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영적 투쟁의 일부분이다.”(2516)
육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육체의 욕망이 생존 이상으로 높아지면 영혼의 생존에 신경 쓸 에너지까지 빼앗깁니다.
따라서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육의 생존에 치중하는 사람과 영혼의 생존에 치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영혼의 생존을 위해 사랑이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고 그것과 상관없이 육체의 생존에만 치중하는 사람은 어둠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고 영혼이 바라는 사랑을 찾는 사람이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심판에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행복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영원히 살고 행복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인 행복과 육체적인 생존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사랑이 갑니다.
사람은 40일 밥은 굶어도 사랑은 단 3일 굶어도 죽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이란 영화에서 사형수 윤수는 자신을 사랑해 준 유일한 유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는 게 지옥 같았는데…. 내…. 살고 싶어졌습니다.”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을 보고 올라오는 물고기는 오징어밖에 없습니다.
생존도 중요하지만 빛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빛이 아니면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없어야 합니다.
육체를 살리느라 사랑을 찾는 것을 잊지 맙시다.
심지어 고양이도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리가 먹을 것, 누릴 것, 세상 것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며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판은 사랑을 바라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사람이 십자가 사랑으로 나아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보다 큰 사랑이 없고 이것보다 큰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악이란 육체의 행복에만 치중하며 영혼은 돌보지 않는 삶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