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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3-23 조회수 : 3501

결국엔 자녀는 아버지가 속한 곳에 속하게 된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요한은 그들이 땅의 아버지에게서 났고 그래서 땅에 속해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향하지만,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은 땅의 아버지에 묶여 땅의 욕망을 추구하며 죽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44)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느 아버지에 속해있고, 어느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욕망’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하늘 아버지를 믿는 것이 왜 필요한지 잘 설명해줍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아버지가 속한 세계로 향하고 그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보통 자녀에게 인간임을 믿게 하고 인간으로 생존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남에게 무언가를 내어 줄 줄 알아야 살아갈 수 있는 수준으로는 들어 높이지 못합니다. 어머니에게만 자라면 아기는 필연적으로 매우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인터넷 카페에 나와 있는 사례를 소개합니다.


“외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남편과 사별한 김모 할머니(78·서울 관악구). 남편의 죽음은 살림만 챙기던 할머니를 아무런 준비 없이 냉정한 세상으로 내몰았다. 가진 기술이나 밑천이 없던 할머니는 파출부를 전전했다.


그렇지만 하나뿐인 아들 교육만큼은 소홀하지 않았다. 없는 살림이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 흉을 볼까, 혹 자신의 가난이 그대로 대물릴까 봐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끼니도 걸렀다. 재혼할 기회도 있었지만 포기했다. 아들만을 ‘삶의 희망’으로 삼고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았다. 


그런 아들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최고 일류대학’을 졸업했다. 아들이 결혼한 뒤에도 할머니는 입주파출부 생활을 계속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사치란 생각에 조금이라도 목돈이 생기면 아들의 사업자금에 보탰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돌아온 아들 가족의 태도는 냉담했다. 파출부도 힘에 부쳐 1년 전부터 어쩔 수 없이 아들 집으로 들어갔지만, 손자 앞에서 대놓고 무시당하기 일쑤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예 밥도 같이 먹으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더 나이 들어 병이라도 걸리면 양로원에 버리겠다.’라는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김 할머니는 ‘지금까지 자식 하나만을 위해 내 앞으로 된 통장 하나 만들지 못하고 살았지만 이런 대우를 받으니 너무 억울하다.’라고 하소연했다.”

[출처: ‘자녀에게 올인하는 부모들’, 다음 카페, ‘인천만수초등학교38회’]


김모 할머니가 아들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들이 그렇게 어머니에게 모질게 대하게 된 것일까요? 할머니의 잘못은 없습니다. 다만 아들이 나누는 본성을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데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무엇을 직접 주지 않고 어머니를 통해 줍니다. 따라서 자녀는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과 아버지에게 받는 사랑을 다르게 느낍니다.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은 자기 자녀를 생존하게 만드는 어쩌면 이기적인 사랑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를 내어주는 사회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따라서 어머니에게 보은할 줄 모르는 저 자녀는 사회생활도 원만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 세상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사랑도 이와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끝까지 알려주시려는 이유는 어머니의 사랑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배워야 아버지의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예수님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속할 수 있는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는 삶은 그야말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히틀러의 나치가 만들어낸 것 중의 하나가 ‘아기 공장’(레벤스보른)입니다. 아리아인들의 혈통만 남긴다는 신념으로 나치는 금발에 장신, 그리고 푸른 눈을 가진 친위대원과 미혼의 여성들을 말 그대로 ‘교배’시켜 아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많은 이들이 나치의 선동에 넘어갔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비극 자체입니다.


아기는 먼저 어머니를 만나고 집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며 아버지를 만나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춥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가 믿고 따르는 아버지의 세상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읍시다. 그래야 하늘 나라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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