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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3-22 조회수 : 3755

죄책감이 우상숭배인 이유: ​부모는 자녀를 태어나기 전부터 용서한다


오늘 복음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당연히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도 무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당신 본성인 자비는 더욱 포기할 수 없으니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타인을 단죄하는 사람들은 그 단죄하는 자아가 자기 자신까지 단죄하고 있으니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라고 물으시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남을 단죄하지 않을 때 당신도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타인의 심판을 받아들이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선 타인이 나에게 하는 판단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완벽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피를 말리는 삶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 앞에서 완벽하게 보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부족한 자신으로 살아가면서도 자유롭기만 합니다.


그다음은 ‘자신도 타인을 판단’합니다. 나도 돌을 들어야 죄책감에 짓눌린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판단하고 그렇게 관계의 단절을 경험합니다. 누구도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판단을 멈춰야!’ 합니다. 내가 판단하니까 타인의 판단도 가치를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타인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내가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심판하면 타인도 나를 심판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 모습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무서운 심판관으로 여겨 자신들에게 벌을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죄의 탓을 다른 이에게 돌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참 창조자요 부모로 여기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자는 창조할 때부터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왕좌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많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왕위에 오르자 그 적들은 신변에 위협과 함께 극도의 불안에 싸였습니다. 흘러나오는 말에 의하면 왕은 자기를 반대하고 대립하던 모든 사람의 명단을 작성했다는 것이고 더욱이 그 명단의 이름 하나마다 왕이 직접 검은 색깔로 십자가를 일일이 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들이 들리자 어떤 이들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부랴부랴 파리를 벗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간 이들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임금이 전의 적이었던 그들을 분명하게 용서했으며 목숨을 보장했다는 것입니다. 왕이 그들의 이름 위에 직접 그린 검은 십자가는 그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가 용서받은 이들임을 되새기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부모가 아기를 뱃속에 가졌을 때, 아기가 태어나서 많은 죄를 짓고 살 것을 예상합니다. 그렇지만 그 아기를 여전히 사랑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고 죄를 짓기 이전부터 자녀의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 표징이 ‘십자가’입니다. 이 용서를 받아들일 때야만 참으로 그분을 창조자요 부모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 안의 죄책감으로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타인에게 돌리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하느님을 창조자요 부모로 여기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타인을 판단하는 것을 멈춰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하느님을 창조자요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심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마셜 로젠버그’란 심리학자는 ‘비폭력대화’를 주창했습니다. 판단은 타인에게 하는 폭력입니다. 폭력을 가하면서 대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 폭력을 일단 거둬들이는 방법이 ‘판단중지’입니다.


로젠버그가 어린 시절, 누가 봐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름이 뭡니까?”(What’s your name?)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요.”(I am Jesus Christ, the Lord)라고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시지 않아서 뒤의 “The Lord”라는 말만 듣고는 “아, 로드(Lord)씨, 그러면 잠깐 들어오시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잠깐이 7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집에서 7년 동안 머물러 살게 된 것입니다. 7년을 살았다면 그 사람이 완전히 정신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 할머니는 잠깐의 판단을 중지하여 오랜 친구를 사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공공의 적’이란 영화에서 아들이 부모를 시해하고 유산을 빨리 물려받으려고 했을 때 부모는 죽어가면서도 자녀의 부러진 손톱을 삼켜 자녀의 잘못을 덮어주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여깁니다. 유일하신 심판관께서 우리 죄가 당신 탓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또 다른 재판관을 고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법정에 재판관은 한 명이면 족합니다. 그리고 그 한 명을 우리는 우리에게 항상 무죄를 선언하시는 우리 아버지로 고용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유일한 심판자로 믿는 증거는 내가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나 자신과 이웃에 대한 ‘판단이 중지됨’이 곧 죄를 용서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많은 이들과 깊은 친교가 이뤄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부모로 믿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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