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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3-21 조회수 : 3910

3월21일 [사순 제5주일] 
 
복음: 요한 12,20-33
 
밀알의 신비: 발 씻김 받는 것보다 발 씻어주는 게 더 행복하게 될 때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분명 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가치에 관해 묻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정 가치 있는 죽음이란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2,500년 간 이어지는 철학의 주류를 형성한 사람입니다.
그의 열매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죽음을 연상하시며,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열매를 맺는 죽음은 나를 위한 생이 끝나는 ‘그냥’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자발적인’ 죽음이어야 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진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았고, 예수님도 그 길로 가고 계십니다.
그러며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라고 청하십니다.
이는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시는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도 영광을 받으시라는 청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응답하는데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
 
아드님께서 당신을 위해 죽어가심으로 또한 끊임없이 영광을 내려주셨는데,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도 성령으로 부활시키는 영광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이 말씀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며칠 전 저의 논문지도 교수님이셨던 돈 조르지오 마짠티 선생님이 병환으로 아버지 품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분께 논문을 쓰던 다른 교구 신부님들과 서로 연락하며 슬픔을 달랬습니다.
부족하기 그지없지만 저희가 그분의 작은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서신학을 하다가 교의 신학으로 바꾼 이유도 그분에게 논문지도를 받고 싶었던 이유가 매우 컸습니다.
사제가 되어 다시 유학을 떠날 때 그분에게 배워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갈 곳 없는 청년이나 알코올 중독자들, 또 집을 잃은 부부와 함께 사제관에서 산다는 말을 하였을 때
그것을 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분이 가난하게 사신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지가 찢어져 팬티가 다 보이는 모습으로 옷도 남이 버린 것을 주워입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나 사제관에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맞아들이셨다는 것은 좀처럼 믿기 어려웠습니다.
함께 논문을 쓰는 신부님들과 방문하였는데, 역시 성인처럼 사시고 계셨고 본당 신자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러하셨습니다.
 
논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한국으로 초대하겠다고 약속드렸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바쁘게만 살아오는 가운데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접한 것입니다.
저는 그분이 병이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분께서 주시는 마지막 가르침이라 여기고 유튜브에서 4년 전에 신자들에게 하셨던 한 강의를 들어보았습니다.
 
용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진정한 용서가 무엇일까?’란 주제에서 그분은
“용서를 하는 사람은 기쁘고, 감사해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진정으로 용서하는 아버지는 기뻤고 윤리 주의자였던 맏이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기쁘지 않으면 참으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교수님은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으셨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당신 본당에 부모님이 머물러 오셨었는데 아버지와 크게 싸웠고 매일 싸웠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해도 교수님은 용서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용서는 했는데 매일 싸웠습니다.
신부님은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며 그 이유를 깨달으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나를 용서하시며 기쁘실 텐데 나는 왜 아버지를 용서한다고 하면서 기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네가 용서하면서 상대보다 더 높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베드로의 발을 씻어줄 때 그보다 높다고 여겼다면 그런 행위를 할 때 나에게 기쁨이었겠느냐?
내가 하느님이면서도 내가 낮아지게 만들어주는 제자들에게 나는 감사할 수 있었고 그래서 씻어주면서도 기뻤다.
기쁘고, 감사하지 못하면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그분은 묻습니다.
“왜 사제들은 고해소에서 용서해 주면서 기쁘지 않을까요?
용서해 주면서 신자들보다 위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서는 아버지와 한 번도 다투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렇게 진정으로 용서받았다고 느끼며 다시 내려가셨다고 합니다.
 
기쁘게 안아주어야만 진정으로 용서한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아마도 저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가시는 가르침이신 것 같았습니다.
 
용서는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준 상대에게 감사하고 그래서 기쁜 축제와 같습니다.
참 행복은 타인에게 호랑이처럼 강한 사람이 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군고구마처럼 양식으로 먹히려는 사람이 되려는 데 있습니다.
 
내가 호랑이가 아니라 고구마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나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내가 용서해야 하는 사람들이 나의 은인들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주는 자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아버지에게서 오는 영광을 받게 해 주는 사제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고구마가 되겠다고 강론을 했더니 어떤 분이 에어프라이어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남을 위해 먹히는 사람이 되려고 목숨을 내어놓겠다고 하니까, 하늘에서 그 고구마가 먹기 좋은 군고구마가 되게 만드는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고구마가 되게 만드는 이들을 용서하는 것을 넘어서서 기쁜 마음으로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발의 씻김을 당하는 사람보다 발을 씻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기쁘게 십자가에 올려지기 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길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고구마가 되고 고구마로 만들어주는 이들에게 감사합시다.
덕분에 에어프라이어가 곧 내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넘어선 나와 나의 열매를 위한 축제의 자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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