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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3-19 조회수 : 3467

요셉 성인이 알려주시는 ‘적극적 고독의 힘’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요셉을 우리는 ‘의롭다’라고 표현합니다. 의로움은 내가 죄를 용서받은 것처럼 나도 타인의 죄를 용서할 때 생깁니다.


노아의 벗은 모습을 형제들에게 알린 아들 ‘함’은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덕분으로 살아남은 사실을 잊고 아버지의 치부를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셈과 야펫은 아버지의 몸을 보지 않고 뒤로 들어와 아버지의 겉옷을 덮어드렸습니다. 그렇게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덕분으로 죄가 용서받은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낸다면 의로움을 잃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 요셉은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을 모르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잘못을 덮어주려 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여 성모님을 보호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모님의 잘못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그러면 아기 예수님의 생명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의인 성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여 잉태시키고 이젠 싫어지니까 파혼하고 버려버리는 파렴치한이 됩니다. 마리아의 죄를 들추어내지 않기 위해 마리아와 그 가족, 또 자신의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을 의롭게 만들려면 자신은 십자가와 고독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마 사순절에 요셉 성월이나, 성인의 축일이 겹친 이유도 이러한 섭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의 고독을 사랑하지 않으면 의로워질 수 없음도 함께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도 의로워지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홀로 가셨습니다. 이 힘은 바로 의로워짐으로써 당연히 거쳐야만 하는 ‘적극적 고독’에서 나옵니다.


적극적 고독은 내가 세상과 나를 사랑했던 이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버려지고 미움을 받을 때 머물 수 있는 ‘나만의 작은 골방’과 같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신지, 계시지 않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물면 힘들기는 하지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를 받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모든 사실을 알려준 것처럼 말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이런 고독을 느껴보았습니다. 형제는 물론이요, 부모님도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기던 때였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있던 고향이 아닌 먼 곳으로 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 타지에서 그래도 역시 타지로 다니는 한 친구와 친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소위 일진이라는 아이로부터 그 아이가 구타를 당하고 있을 때 저 혼자 나서서 아이를 구해주었습니다. 싸워서 이긴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또 수원역에서 그 친구가 깡패들에게 끌려갔을 때도 그 친구를 구하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이미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을 때 누구도 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친구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는 결국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모인 학생들의 집단이지 가족과 같은 끈끈한 우애를 발견하기는 힘든 곳이었습니다. 저는 결국 세상에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외롭다, 외롭다.’라고 느낄 때 한 개신교 다니는 친구가 “너 성당 다니잖아.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왜 외로워?”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냐?”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말이 늘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저는 학교에 등하교하기 위해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다녀야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있을 때 시원한 바람 속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느낌과 함께 그분의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후로는 외로움이라는 것은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위에 친구들이 엄청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외로움을 느끼니까 친구가 없었던 것이고, 고독한 나만의 방이 생기니까 친구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결국 누군가와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이고 고독은 절대적인 분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도시에서 느끼고 고독은 광야에서 느낍니다. 외로움은 타인을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불만족이고 고독은 절대자를 만나기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머무르려는 골방입니다.


요셉 성인이나 예수님은 이 고독의 힘으로 십자가를 지고 의로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요셉 성인이 자신과 약혼한 여인이 타지에 갔다가 임신하고 돌아왔을 때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만약 요셉 성인에게 고독의 골방이 없었다면 용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면서도 그녀와 함께 있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사실 외로운 사람이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미워하면서라도 그 사람을 자기 머리에 잡아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그 골방이 있다는 이유로 미운 사람을 놓아줄 수 있습니다. 그 골방 안에서 운이 좋으면 절대자가 보낸 천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독을 즐기십시오. 이것이 ‘적극적 고독’입니다. 이 노력이 ‘광야’로 나오는 삶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혼자 산을 올라도 좋고, 여행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무작정 혼자 일주일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을 만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느끼는 소외감 같은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 친구,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고독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재수가 좋으면 천사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는 고독을 즐길 줄 알 때 시작되고 적극적으로 즐길 줄 알게 된다면 굳이 미움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내 안에 잡아놓을 필요까지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의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사순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요셉 성인의 선물일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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