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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3-09 조회수 : 3374

용서의 완성은 그 사람과의 관계 회복으로 얻는 기쁨


오늘 복음은 ‘용서’가 주제입니다. 베드로는 하루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 못 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평생 한두 가지 잘못 한 것이지 하루에도 일곱 번씩이나 잘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베드로가 무척 화가 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만 탈렌트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는다면 어떻게 하느냐는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수조 원을 탕감받은 사람이 수천만 원 빚을 진 사람의 멱살을 잡는다면 하느님도 정의상 다시 수조 원을 갚으라고 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일만 탈렌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가 씻긴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 누군가 사업에 실패하여 부도가 났을 때 돈 많은 사람이 그냥 100억을 거저 주려 하는데 그 사람이 100만 원 빚진 사람을 재판에 걸면 100억 주려는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더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용서가 결코 빚진 것을 탕감해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빚을 탕감해준다는 것은 이전의 빚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 모든 죄를 잊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의 완성은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다시 회복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일만 탈렌트를 탕감해 준 임금은 그 빚 때문에 자신에게 오지 못하는 사람과 다시 회복되는 관계 때문에 기쁩니다. 또한, 그 탕감받은 사람이 누군가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을 보면 더 기쁠 것입니다. 용서의 궁극적 목적은 관계의 회복에 있습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의 마지막 부분에는 ‘가시밭길 위의 보속’이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모니카 자매님의 이야기입니다.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평생 여섯 동생을 키우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하며 살았고 결혼도 하지 못했습니다. 유방암에 걸렸지만, 돈이 없어 치료도 못 받고 병만 키우다 도저히 안 되어 이젠 혼자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게 해 달라며 찾아온 것입니다. 동생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고 하여 연락도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수술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돈도 없고 그러면 조금 더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술을 거부했습니다. 동생들을 위해 살 만큼 살았으니 빨리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수녀님은 삶의 의욕이 없는 그 자매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여 수술비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자매님은 온종일 기도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성모님께서 “딸아, 내가 다 안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자매는 주인집에서 일할 때 음식을 몰래 가져다 동생들에게 준 사실을 성모님께서 다 안다고 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은 주인에게도 이미 용서를 받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둑질한 것이 창피해 고해성사는 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수녀님은 병자성사 때 고해성사를 하라고 했지만, 창피해서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에게 미리 그 사실을 말씀드렸고 신부님도 고해성사 중에 그 죄는 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대신 그 이야기를 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수녀님께 말했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수술을 잘 받고 70세가 넘기까지 잘 사셨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동생들을 위해 행한 작은 죄까지도 하느님께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는 그만큼 자신도 남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자매는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에게 보답하지 않는 동생들을 다 용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기 싫고 빨리 죽고 싶은 만큼 삶에 의욕과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 그만큼 용서받은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너무 엄하신 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도 동생들을 용서하는 것이 그만큼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삶이 너무 어려워 그냥 죽는 것을 원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미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상대가 나에게 한 일을 잊는 것이고 그것을 넘어서서 상대와 함께 있어도 기뻐야 합니다. 기쁨이 없으면 용서도 진정으로 할 수 없고 한 것도 아닙니다. 미운 사람을 안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어도 행복할 만큼 일만 탈렌트 탕감 받은 사실을 즐겨야 합니다.


마리아 고레티 성녀는 자신을 찌른 사람을 용서하느냐는 사제의 질문에 죽어가면서도 “저는 그분을 용서할 뿐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 함께 살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이유는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또한 쉽지는 않겠지만 용서의 최종 목적지는 그 원수와 같은 사람과의 기쁜 관계 회복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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