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사순 제3주일]
복음: 요한 2,13-25
우는 이들은 행복하다: 눈물이 채찍이 될 때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하는 ‘성전정화’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폭력을 쓰신 유일한 장면입니다.
사랑이 폭력이 되는 경우는 그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죽을 때입니다.
저도 예수님께 폭력을 당해본 적이 있는데 신학교에 들어와서입니다.
사제로 불러주신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왜 내가 이렇게나 많이 바쳤는데 나를 행복하게 해 주지 않으시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때 내 안에 모신 성체에서 울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너에게 다 주었다.”
나는 내가 가졌다고 착각한 것을 주님께 드린다고 또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분명히 ‘진리’였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채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채찍은 ‘은총’이었습니다.
은총이 제 안에 있는 장사꾼을 몰아내었습니다.
저는 제가 드리는 것으로 무언가 보답을 달라고 주님과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은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에게 생명을 내어주고 계셨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 채찍이 너무 따가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장사하던 마음은 채찍에 맞아 눈물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하게 하였습니다.
“주님, 당신께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나도 누군가를 위해 피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죽음을 통해 우리 마음의 성전을 정화하시고, 또 우리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정화하는 방법입니다.
눈물과 피는 채찍이 되어 누군가를 장사꾼의 소굴에서 성전으로 정화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때문에 저를 위해 흘리신 눈물로 제가 정화되는 것을 보시고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이기헌 주교의 『함께 울어주는 이』라는 책에는
오래전 당신이 첫 본당에서 사목하시던 당시의 이런 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신부님이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오랫동안 성당을 비워야 했기에 특수 사목을 하는 동창 신부에게 본당을 맡기고 떠나있어야만 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걱정했던 자매 한 분이 그동안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자매에게는 두 아들과 남편이 있었는데, 자매님은 비신자인 남편이 어찌나 고집이 쎈지 그렇게 오랫동안 성당에 가자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속상해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주일미사에 나온 것입니다.
아내를 잃게 만든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할 텐데 성당에 나와 본당 신부에게 먼저 “저 예비자 교리반도 시작했습니다.”라며 인사하였습니다.
한 편으로 ‘그렇게 완고하던 분이 어찌 된 일인가?’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동안 본당을 맡아준 동창 신부 덕분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그 자매를 방문해 봉성체도 해 주고, 병이 악화되자 정성을 다해 병자성사도 해 주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과 남편을 남겨두고 떠나는 자매님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그 신부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사제가 보여준 ‘눈물’이었습니다.
신부라면 늘 하는 일인데도, 자기 본당 신자도 아닌 사람과 그 가정의 슬픔을 마음으로 함께하며 자기 일처럼 눈물을 흘리는 신부가 정말 감사했고 큰 위로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주교님은 책에서 이 말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눈물로 씻겨진 영혼 안에서 위로를 받으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플 때 울지 않으면 몸이 대신 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한 스트레스가 건강을 망친다는 뜻일 것입니다.
SBS 스페셜 92회, ‘신이 내린 묘약 –눈물’(2007)에서는 왜 우는 사람이 행복한지에 대한 한 사례를 제시합니다.
서울 양천구의 김진성씨.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40대 가장입니다.
군인 장교 출신인 그는 여러 번 사업이 실패해도, 아내와의 이혼위기에서도, 혹독한 사춘기로 방황 하는 아들 앞에서도 절대로 울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아빠는 감정도 없는 냉혈한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그가 변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우는 모임’을 통해 스스로 마음속에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앞에서,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가정이 변하는 놀라운 경험을 체험했습니다.
상처받았던 아들과 아내의 마음이 아빠의 눈물로 녹아내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많이 우셨습니다.
그때 우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웃고 계십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울어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쉴 안식을 마련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피와 눈물로 성전을 마련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때에 내가 눈물로 재건한 성전이 나의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눈물은 자아의 피입니다.
자아는 나를 잡아먹는 뱀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죽으면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생명의 눈물이 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채찍이 되어 다른 영혼을 정화합니다.
내 영혼의 정화가 곧 다른 영혼의 정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고 나 때문에 정화된 사람은 나의 성전이 됩니다.
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의 안식처가 되어드리며 동시에 자신의 안식처를 눈물로 닦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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