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6,19-31
어린이 때부터 십일조를 교육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이는 루카 복음만의 독특한 전통인데, 결국 내어놓음과 믿음은 비례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거지 라자로에게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아서입니다.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은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자기 형제 다섯에게 라자로를 부활시켜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는 그가 착해서가 아니라 형제들이 오면 자신이 더 고통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자신 때문에 지옥에 오게 된 이들이 자신을 더욱 괴롭힐 것이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지는 곳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핵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결국, 구원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부자는 자신이 믿지 못한 것이 표징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믿을 마음이 없어서 믿지 못한 것이지, 믿을 마음만 있다면 성경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믿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왜 믿을 마음이 없으면 라자로가 부활하는 것을 보더라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요?
믿으면 그 믿는 분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내어놓아야 할까 봐 믿지 않는 핑계를 표징이 없다는 것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저도 스물다섯 살 때 주님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이전부터 불러주셨지만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귀를 막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불러주시고 있다면 확실한 표징을 좀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고민하던 중 술을 마시고 새벽에 성당으로 올라갔습니다.
성당 앞에 있던 성모상에서 푸른 빛이 솟더니 성모상이 성모님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두려워 무릎을 꿇었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가끔 성모상 다리를 보았지만 여전히 다리는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왜 계속 계시나?’라는 불만까지 생겼습니다.
한 20여 분 동안 그러고 있다고 무릎이 너무 아파져 올 때 즈음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성모상은 다시 대리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내려오면서 ‘내 착각이었겠지. 술을 마셔서 그래. 성모님이 나에게 나타나실 리가 있나?’라는 생각을 했고, 계속 “저를 불러주시려면 표징을 좀 내려주세요!”라고 청했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 없어서 표징이 주어져도 믿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믿을 마음만 있었다면 ‘행복’이란 모토를 어렸을 때부터 가지게 해 주셔서『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게 하셨고 주님을 따르는 행복을 깨닫게 해 주시어 저를 불러주셨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제 일생을 글로 써보고 난 후에야 저 자신을 내어주기 싫어서 스스로 믿기를 거부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하는 일은 그만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믿어서 자기 것을 내어놓게 될까 봐 그냥 믿기 싫은 것입니다.
성경엔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나와 있습니다.
부자는 그게 싫어서 안 믿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내어놓는 법을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요?
라자로는 자신의 종기를 개들이 핥게 했습니다.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믿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내어놓음’과 ‘믿음’은 궁극적으로 ‘하나’입니다.
이것이 어렸을 때부터 봉헌과 자선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습관이 들었다면 커서도 신앙을 잃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 어렸을 때는 쉽게 부모를 찾는데 어른이 되면 천상 부모를 찾는 사람이 그렇게 적을까요?
어렸을 때는 자아가 발동하지 않았고 커서는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생각을 통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아기들은 언어가 없으니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쉽게 부모를 찾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자아가 생각을 통해 소유욕과 성욕과 교만의 욕구로 자신을 오염시킵니다.
이 욕구들을 잃게 될까 봐 믿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세 욕구 중,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소유욕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바로 하느님께 바쳐야 했던 선악과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 했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내어놓는 연습을 시킨다면 자아의 영향이 그만큼 줄어들고 그러면 믿기가 쉬워집니다.
내어놓아도 크게 가난해지지 않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며 오히려 기분이 좋아짐을 깨닫기 때문에 주님을 믿어서 자신의 것을 내어놓아야 할 때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존 록펠러만큼 큰돈을 번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는 30대에 이미 세계 최고 부자였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 그렇게도 록펠러를 십일조의 모범으로 꼽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큰 부자가 되어서도 십일조를 계산하는 직원이 40명이 될 만큼 십일조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처음으로 일을 해서 번 돈이 1달러 50센트였습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일하고 받은 돈을 집으로 가져가서 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어머니에게 돈을 드리면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돈을 앞치마로 감싸면서 제 눈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얘야, 네가 주님에게 십일조, 그러니까 15센트를 드린다면 엄마는 아주 자랑스러울 게다.’
저는 난생처음으로 번 돈의 십일조를 하느님께 드렸고, 그 후 지금까지 빠짐없이 십일조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때 1달러 50센트에서 15센트를 떼어 드리지 못했다면, 제가 처음으로 백만 달러를 벌었을 때
십일조를 드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5센트를 봉헌하지 못한다면 10만 달러를 봉헌하는 것은 훨씬 어렵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봉헌하는 습관을 들이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습관을 들이게 한다면 그 아이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내어줄 수 있는 만큼 자아가 줄어들고 자아가 줄어든 만큼 믿기 쉽기 때문입니다.
내어주는 마음과 믿는 마음은 결국 하나입니다.
자녀가 믿음을 잃지 않게 만들려면 내어주는 법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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