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관계, 무대 공포증을 없애는 방법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위선에 대해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실상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나를 잘 보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며 늘 두려워합니다. 어떤 스님의 즉문즉설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너무 어려워하고 많이 긴장하는 것이 고민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기 바쁘고 늘 정신이 없고 잔뜩 긴장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너무 말이 없고 대하기 불편하고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이 너무 속상한데도 사람들 앞에서는 제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대 공포증’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인관계로 확대되면 대인관계 공포증이 됩니다. 이 마음의 근저에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도 이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강의할 때 여전히 긴장될 때가 있고 권위 있는 사람을 만날 때도 여전히 긴장합니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매우 좋아졌습니다.
대인관계,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려면 2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 단계는 ‘깨달음’입니다.
우선 우리 대부분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란 착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삽니다. 심지어 부모까지도 자녀를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녀를 이용하며 삽니다.
“너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니?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어?”
자기 영광을 위해 자녀를 이용할 때 나오는 전형적인 말입니다. 부모도 자녀보다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겠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애인은 안 그럴까요?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 에릭은 7살 때부터 클라리넷을 시작해 캐나다 콩쿠르에서 3번이나 우승한 천재입니다. 대학에 가야 할 나이가 되자 에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이 모이는 미국 콜번 스쿨에 대학 입학 원서를 냈습니다. 특별히 세계적 클라리넷 연주자 예후다 길라드 교수에게서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합격 통지서가 오지 않아 캐나다의 하버드라 불리는 맥길 대학교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학교를 마치고 다시 콜번 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길라디 교수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네는 2년 전에 합격하고도 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또 입학하려는 것인가?”
이에 의문을 느낀 에릭은 이메일 복원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실제로 입학 허가 이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길라드 교수의 지도뿐 아니라, 수업료, 기숙사비, 생활비, 학비 전액 지원을 하겠다는 약속까지 들어있었습니다. 하지만 합격 메일은 삭제되어 있었고 입학 거절 메일까지 보내져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알고 보니 이 모든 일을 꾸몄던 범인은 당시 여자친구였던 제니퍼 리였던 것입니다. 에릭은 당시 여자친구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이메일 비밀번호 등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입학 통지 메일을 처음 본 것은 제니퍼였고 그 메일을 지우고 몰래 입학 거절 메일까지 보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애인이 자신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에릭은 교육 기회 상실, 그동안의 잠재적 수입 손실 등을 들어 제니퍼를 고소했고 법원은 한화 약 3억 원의 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랑이나 부부관계, 가족 관계, 친구 관계 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기적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준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완전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도 반은 하느님 사랑, 반은 이기적인 사랑이 섞입니다.
어떤 존경받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세상 영예는 아무 소용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 강론 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영광을 받는 것은 평생 노력해 온 결과입니다. 그런데 제가 단 세 마디로 평생 쌓아 올린 영광이 지푸라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신자들에게 욕을 한마디 했습니다.
신자들은 신부님을 좋아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뭐 저런 신부가 있나?’라고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욕을 한 번 더 하자 자리를 뜨는 신자들이 생겼습니다. 세 번째 찰진 욕을 하자 신자들도 신부님에게 삿대질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말했습니다.
“평생 쌓은 영광도 단 세 마디에 무너집니다. 이것을 위해 평생 긴장해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 단계는 단순합니다. 첫 번째가 세례와 같은 것이라면 두 번째는 견진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에 변할 수 없으므로 자꾸 해 보는 것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 강론을 처음 시작할 때, 역시 떨렸습니다. 그러나 강론 시작 전에 속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되뇌었을 때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너무도 강렬하여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긴장할 때마다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하지만 다음번도 떨렸습니다. 하고 또 하다 보니 나중엔 강론하는 게 전혀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두렵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주 해 보십시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체와 같은 것인데,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입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나를 봉헌하지 않으면 나는 점점 커집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나를 봉헌하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이 세 단계는 매일 계속되어야 하고 그러면 점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들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것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좋아한 것입니다. 남에게 영광을 주면서도 결국 그것이 자신을 들어 높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모았던 우표나 나뭇잎은 지금 다 어디 있습니까? 당시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일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하는 마음 안에는 하느님을 위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마태 23,33)라고 부르십니다.
자녀의 본성은 부모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의 본성은 자기 영광을 위해 살게 만드는 것이고, 하느님 자녀의 본성은 아버지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둘은 양립될 수 없습니다. 어둠과 빛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예언을 하라고 보내시며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예레 1,17)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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