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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3-01 조회수 : 3192

미움은 고통의 바다에서 스티로폼이지만
행복의 바다에서는 납덩이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가장 자주 나오는 주제이지만 일상에서 가장 되지 않는 것이 또 용서일 것입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해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득문득 떠오르는 순간은 내가 행복하지 못할 때일 것입니다.
 
보통은 누구를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탓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미움입니다.
하지만 순서상 그 사람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청년이 애인과 헤어져 고통스럽다며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벌써 한 달째 술로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술자리에서 친구와 싸움도 일어나고 부모에게 상처도 주고 돈도 떼이고 직장생활도 잘 안 되는 등의 사건이 더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이 그 애인을 만나기 전에는 행복했을까요?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그 애인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애인은 상대를 행복하게 해줘야만 하는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애인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으면 그 기회를 이용해 떠나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부부가 서로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그 미움 전에 각자의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나기 전에 외로웠고 만나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행복하지 못하니 그 탓을 상대에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행복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용서에 대한 이러저러한 방법을 제시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가 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해도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고통스러워서 미워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의 근본 원인을 알아야 참다운 용서가 생깁니다.
미움이 고통에서 시작된다면 행복하면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용서하기 위해 그 사람을 계속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이란 물 밑으로 가라앉히면 됩니다.
 
천국에 미운 사람과 함께 있는 편이 나을까요, 아니면 미운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천국 행복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까요?
모두 미운 사람과 있어도 천국에 머물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천국에 있다면 미움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행복할 수 있는 천국만 이 세상에서 발견한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더라도, 혹은 살해당했더라도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용서는 행복으로 미움의 고통을 수장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마치 암초처럼 우리 배를 긁습니다.
방법은 물 수위를 높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들 가운 데 있다면 그 행복의 수준이 고통을 넘어서기 때문에 미워할 이유도 사라지게 됩니다.
 
2015년 6월 17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흑인교회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던 신자 9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총을 난사한 범인은 21세 백인 청년 딜런 로프는 백인 우월주의자였습니다.
19일 법원 대형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보석 여부를 결정하는 약식재판정에는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가해자에게 직접 얘기할 기회를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관행에 따라 유족들은 한 명씩 범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네이딘 콜리어, 어머니를 잃은 딸]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갔습니다.
엄마와 다시는 얘기를 나눌 수도, 엄마를 다시 안을 수도 없지만,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 영혼에 자비가 깃들기를 빕니다.
당신은 나를 아프게 했어요. 다른 많은 사람을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펠리샤 샌더스, 아들을 잃은 어머니]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죽게 했어요.
내 살점 하나하나가 다 아픕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예전처럼 살아가지 못하겠죠
하지만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 영혼에 신의 자비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이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용서의 말을 하자 범인도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부모와 자녀를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 교회가 나눔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용서해도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손을 부여잡고 죽은 이들을 애도하며 서로를 위로했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자비의 공동체에서는 용서할 수 있는 에너지가 흘러넘칩니다.
 
용서가 안 될 때 그 사람과 직접 맞대결하지 마십시오.
그건 잘못된 해결방법입니다.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은 납덩이처럼 가라앉습니다.
 
행복하려면 행복한 공동체에 머무르려고 하십시오.
그런데 직장과 같은 데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눔의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족 공동체는 좋기는 하지만 너무 작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어떠한 고통이 와도 그 고통을 이겨낼 공동체에 속해있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사랑이 쏟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그 행복의 수위가 모든 고통을 넘어설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독특하게 ‘용서하는 마음’과 ‘주는 마음’이 결합하여 있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도 하십니다.
 
용서와 주는 것은 서로 다는 것 같지만 실제로 같은 ‘자비’에서 나옵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서로 나눌 줄 아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용서도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용서도 자비고, 주는 것도 자비입니다.
주는 마음이 사라지면 용서하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용서의 힘도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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