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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2-28 조회수 : 2957

예수 없는 십자가, 십자가 없는 예수
 
 
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변모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겁을 먹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영광에 함께 하고 싶어 베드로는 그 산에 초막을 짓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에 대해 예고하실 때 베드로는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상황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십자가를 거부한 채 하느님 영광만을 추구하면 사탄과 같아집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않으며 에덴동산에 살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 같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 사는 영광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하와가 내미는 선악과도 즐기려 했습니다.
이는 어쩌면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며 예수님처럼만 되려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하늘의 영광인데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영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십자가를 버리고 벽에 예수님만 매다는 경향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요즘 성당을 지을 때 적지 않게 십자가를 없애고 부활하시는 모습의 예수님만을 표현하는 예도 있습니다.
의무는 다하지 않고 영광만을 추구하겠다는 뜻이 깊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십일조와 같은 의무를 말하면 극단적으로 거부합니다.
하느님께서 꼭 그런 의무를 해야만 축복을 주시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개신교는 예수님을 없애고 십자가만을 답니다. 의무만 철저히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처럼 되는 영광은 감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술과 담배는 하지 않고 십일조도 내지만 정작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성체성사나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는 바라지 못합니다. 약간은 바리사이, 율법학자적인 모습으로 하느님 자녀의 영광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그저 죄인이라고 고백만 할 뿐입니다.
 
동시에 자신이 실행한 의무 때문에 이웃을 더 많이 판단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아버지로부터 바로 용서받을 수 있으며 그래서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는 하느님 자녀가 지녀야 할 능력을 좀처럼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 두 모순적인 방향에서 균형을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십자가의 시작인 십일조와 그리스도 영광의 정점인 성체를 연결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부담스러워 십일조를 하지 않으며 성체를 영하면, 술과 담배, 그리고 육체적인 쾌락에는 지나치게 관대하면서 성체만 영하고 고해성사만 보면 된다는 식의 지나친 관용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용서할 분이라고 지나치게 자비만 강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단식하지 않고 술과 음식에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기도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술하는 고통은 받지 않으려 하면서 병만 낫기를 바라는 모습과 같습니다.
 
김흥순 자매는 불교 신자입니다. 장이 유착된 상태여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다 게워내며 걷지도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명한 병원엔 다 다녀봤지만 수술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진단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2~3년, 길면 5년은 더 살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수술이 두려워서인지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베드로 수녀님이 설득하자 자매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솔직히 그랬어요. 수녀들은 뭐 하러 죽어가는 사람들이나 만나러 다니고, 냄새나서 가족들도 만지기 꺼리는 환자들의 손을 주물러 주고 말동무까지 해 주는 건가?
특히 무더운 날에도, 치렁치렁 머리까지 긴 옷을 걸치고 다니면서 기도를 해 주는 걸 볼 때면, 자식도 남편도 없이 사는 수녀들 인생이 참으로 딱했어요.”
 
이 자매는 십자가 죽음과 희생의 가치를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기도나 자선, 단식과 같은 가치를 조금씩 잃어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할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 사순 동안 단식이나 단주, 혹은 금연을 하면 괜한 것을 한다고 딱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예수님 등 뒤 십자가를 거부했던 베드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몸의 욕구를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꼭 가야만 하는 가치 있는 길입니다.
 
수녀님은 수술을 거부하는 자매에게 이렇게 현실적으로 설득을 했습니다.
“맞아요. 저희 같은 딱한 사람들도 이렇게 기쁘게 사는데, 자매님은 더더욱 사셔야죠.
수술도 한번 못 해 보고 포기하면 가족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자매님이 싫어도 가족을 위해 수술을 받아보셔야 해요. 수술 결과가 나빠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가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여전히 다른 병원에서는 다 소용없다는데 이 병원에서만 유난히 수술하라는 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녀님의 설득으로 수술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자신과 같은 암 환자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만으로도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웃기도 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대세를 받고 수술도 받아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는 “나는 무조건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설 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인자한 모습으로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의사가 자신을 분명히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그렇게 수술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수술을 받을 때 자신의 발 쪽에 서 계셨던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수술실에는 모두 청색 가운을 입게 되어 있어서 흰색 가운 입은 의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매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였습니다. 두 달 후 교리를 받고 정식 세례를 받았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을 때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짐을 느꼈고 걷지도 못했던 그 자매는 기쁨에 취해 병실을 두 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에 들어선 자매는 감실 쪽을 보더니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저를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기적적으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으며 퇴원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수녀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잘 사신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김흥순 데레사 자매는 고통을 불행으로만 여겼습니다.
수녀님을 보면서도 쓸데없이 고통만 받는다고 여겼고, 자신이 수술을 받는 것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 생겼을 때 치유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용기 없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닌 허황한 꿈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십자가를 받아들인 이후에 비로소 영광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내어주는 타볼산과 같습니다.
이젠 그 산에서 내려와 십자가를 져야만 그 영광이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선악과를 내어드리는 고통, 즉 십일조를 다시 정착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고통도 감수할 수 없는데 부활의 영광인 성체를 모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수술 없이도 치료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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