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1,29-32
회개란 어린이처럼 되는 것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믿으려 하지 않는 군중들을 질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을 믿지 못하고 표징만을 요구하는 것이 악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기적이나 표징은 분명히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고 심지어 믿음까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보다 더 깊은 심연에 있는 것이 ‘원의’(原意)입니다.
원의는 기본적으로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군중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표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분을 믿으면 지금의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무엇이 행복인지 정하는 ‘회개’가 먼저 이뤄지지 않으면 아무리 표징을 주어도 그 표징으로 생긴 믿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회개해야 복음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수녀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유교입니다.”
예순두 살의 교육감 출신의 한 형제는 베드로 수녀님이 병실을 방문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8남매 중 둘째인 이분은 교육감을 지냈고 집안의 기둥이었습니다.
셋째 베드로 형제만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셋째의 부탁으로 수녀님이 매일 병실을 방문했지만 둘째 형님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려 했습니다.
특히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지내지 않는 그리스도교는 상놈들의 집단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수녀님이 천주교에서도 제사를 지낸다고 말은 했지만, 그 시각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베드로 형제는 형님이 죽기 전에는 대세를 절대 받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수녀님께 임종 전 조건부 대세를 드리자고 청했습니다.
드디어 임종의 시간이 찾아왔고 온 가족이 모여 임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형제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수녀님은 지금 행하는 예식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조건부 대세를 드렸습니다.
베드로 형제는 예식이 너무 길어서 그 전에 형님이 돌아가실까 봐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다행히 다른 형제들도 마지막 예식이니 그냥 따라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 형제 가족과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다 바쳐갈 때쯤이었습니다.
의식이 없던 요한 형제가 갑자기 눈을 뜨고 수녀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형제가 놀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형님 깨어나면 안 되는데! 우리 형님 죽어야지 세례 받는데…. 어떡해요, 수녀님?”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입니다.
형님 성격에 자기 허락도 없이 대세 주었다는 것을 알면 동생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 형제는 수녀님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수녀님. 제가 유교에서 죽고, 천주교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요한 형제는 건강이 날로 좋아졌고 어차피 대세를 받았으니 교리를 받고 정식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내가 천주교 신자로 살아났으니, 너희도 다 믿어라! 주일은 모두 다 성당에 가라!”라고 명했습니다.
요한 형제는 그 이후 12년 더 가족과 함께 지내며 모든 동생 가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도왔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이런 사례로 볼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은 과연 어떤 기적이나 표징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냥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요한 형제는 자신이 유교를 믿으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을 행복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면 자신의 행복을 더 들어 높였습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 제사도 지내며 세례도 받고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은총의 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행복의 개념이 바뀐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은 표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결심으로 생기고 사라집니다.
그 결심은 내가 무엇이 행복이냐고 믿는 것에 달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보고 남방 여왕이 그 먼 여행을 하며 찾아왔고, 또한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던 사례를 드십니다.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와 달랐던 것은 ‘변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분명 더 큰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 희망이 무엇이라도 찾게 했습니다.
먼 여행을 통해 솔로몬의 지혜를 배웠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요나의 설교대로 회개했습니다.
이렇듯 찾고자만 하면 저절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옵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길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으려는 마음만 있다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먼저 믿음이 적은 이유를 찾기보다 정말 믿기를 원하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믿어서 손해나는 것이 아까우면 영원히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나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워야 주님을 믿게 됩니다.
아이들은 이것을 잘 압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압니다.
어린이처럼 원할 줄만 안다면 우리가 믿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아는데 어른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로 사는 것이 고통이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모 어머니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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