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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2-15 조회수 : 3161

하느님의 표징은 영광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시고,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셨는데도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었던 라자로가 살아나는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우리를 먹여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은총과 진리’가 있는데도 그것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겐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으로 자녀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가르침을 주는데도 여전히 그분이 아버지임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믿을 마음만 있다면 어머니를 보고 아버지 사랑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태국 광고에서 어머니 없이 자신을 키우는 아버지에 대한 딸의 마음을 닮은 편지 내용이 있습니다.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아빠다. 아빠는 가장 멋있다. 가장 똑똑하고 가장 영리하고 친절하고. 아빠는 나의 슈퍼맨이다. 아빠는 내가 학교에서 잘하기를 원한다. 아빠는 대단하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을 한다. 직업을 가지는 것에 대해. 그는 거짓말을 한다. 돈을 버는 것에 대해. 그는 거짓말을 한다. 피곤하지 않다고. 그는 거짓말을 한다. 배고프지 않다고. 그는 거짓말을 한다. 왜냐하면, 나 때문에.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아빠 사랑해요.”


아빠는 왜 거짓말을 할까요? 사랑은 생색내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런 모습을 아이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런 아버지를 보며 차리라 학교에 가지 않는 편이 아버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빠의 사랑은 자녀에게 점차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곧바로 느낀다면 그 사랑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높은 경지에 도달한 성인들도 예수님의 아주 작은 당신의 계시에 까무러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수난당하시는 예수님상을 보고 엎어져서는 한없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는 미살 때 성체를 바라보며 한 시간이 넘도록 눈물만 흘리셨다고 합니다. 비안네 신부는 사제가 성체의 참 의미를 알게 된다면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이끌어준 교회가 있기에 다행입니다.


따라서 먼저 교회가 베푸는 은총을 감당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아버지는 이를 위해 처음엔 자신을 조금 숨깁니다. 사랑은 생색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생색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면 잘 자랄 수 없습니다. 사랑의 본성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내어주는 순수함에 있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알게 된 아이가 제대로 자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어머니가 존재하듯, 이를 위해 교회가 존재합니다. 먼저 어머니를 믿지 못하면 아버지께 갈 수 없고, 교회를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께 갈 수 없습니다.


김창옥 강사의 아버지는 술과 폭력과 도박, 그리고 폭군에다 호랑이였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아버지가 가정을 파괴하는 주범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고 술도 마시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으려 했습니다. 김창옥 강사가 지금도 딸에겐 매우 자상하지만, 쌍둥이 아들에게는 대하는 게 매우 어색한 이유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자녀에게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가 임플란트하며 아들에게 돈을 내줄 수 없느냐고 전화를 했습니다. 아들은 당연히 내주겠다고 말했는데, 귀가 들리지 않는 아버지는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둥이냐? 아버지다……. 미안하다….”


아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미안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을 생전 처음으로 들었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자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입니다. 다 컸는데도 그렇습니다.


그 이전까지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린 적이 없었던 김창옥 강사는 공항에서 아버지에게 용돈을 처음으로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돈을 세며 뒤돌아 걸어가셨습니다. 그 어깨가 축 처지고 한 다리를 저는 뒷모습을 보았을 때 아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울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아주 조금 사랑했어도 자녀는 그 사랑을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기둥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렸을 때는 다 아버지처럼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무너진 작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모든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압니다. 아버지가 커야 자식도 기가 죽지 않았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자신을 무너뜨리고 갈아 넣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이 두 상반되는 모습에서 처음엔 자신의 사랑을 숨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역할을 어머니에게 맡깁니다. 아버지는 무너지면서도 굳건한 기둥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선 하느님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자녀를 위해 파견받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리스도께 파견받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사랑의 표징이고, 교회는 그리스도 사랑의 표징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보면서도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을 보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직접 보여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자녀에게는 하느님과 십자가에 달린 두 모습을 동시에 보여줄 수 없는 딜레마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보면서도 그리스도를 보여달라는 그런 사람에게 더는 표징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가장 완전한 표징이 어머니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가장 완전한 표징은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 십자가의 참 의미를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 태어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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