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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2-13 조회수 : 2647

질 좋은 강론보다, 지치지 않는 강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로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조금 앞에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오는데 그 차이는 이렇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시기 전, 제자들이 백성들을 가르치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지쳐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셨다고 나옵니다. 
따라서 5천 명을 먹이신 것은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에서 빵 일곱 개, 물고기 몇 마리는 ‘성령의 힘’을 상징합니다. 
바로 이 기적 바로 직전 복음이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청각장애인이자 언어장애인인 사람의 귀를 열어주시고 
침을 발라 혀를 풀어주시는 기적을 하십니다. 물론 하늘에 숨도 내쉬십니다.  
 
이 모든 행위는 ‘성령’을 주시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제자들도 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즉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리스도 공동체의 ‘은총’의 무한성을 말해줍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덕분으로 ‘가르침’과 ‘은총’을 무한대로 베풀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마치 빵 몇 개로 수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처럼 교회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머무시고 계심을 
증거하는 가장 완벽한 표징이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 믿음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데도 망설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바로 직후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르칠 것을 항상 주실 수 있는 분이신데 왜 두려워하느냐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4천 명을 먹이신 후에도 배로 이동할 때 제자들은 빵이 부족하다고 걱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빵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꾸중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5천 명이든, 4천 명이든 얼마든 먹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움도 걱정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그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을 의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도 그리스도의 현존 표징이 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등 뒤에 누가 계신지 증거하기 위해 우리는 밑천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고 가르치고 믿고 베풀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표징이 됩니다.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마더 데레사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되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벌써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그 남자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갔을 때 아이들은 오랜 영양실조로 얼굴이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이나 불행 같은 표정은 없었습니다. 
단지 배고픔의 깊은 고통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 집의 어머니에게 쌀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쌀을 두 몫으로 나누더니 절반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내가 물었습니다. 
 
“어딜 갔다 오셨습니까?”
그녀는 간단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웃집에요. 그 집도 배가 고프거든요!” 
 
마더 데레사는 그녀가 쌀을 나누어 준 것에 대하여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실제로 더 많이 나눌 줄 아니까요. 
 
하지만 수녀님이 놀란 것은 그녀가 이웃집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우리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받을 줄 아는 사람은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이들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으로 생존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배고픔을 볼 수 없습니다. 
나만 급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은총과 진리를 내어주는 데 인색하다면 이는 그리스도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본분은 아낌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은 그 뒤에서 아낌없이 교회에 내어주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강론을 본격적으로 글로 써서 나누기 시작한 이유는 저보다 먼저 매일 강론을 쓰기 시작한 신부님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도 매일 몇 년간 저렇게 다른 강론을 쓰실 수 있다면 그분들에게 그런 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저에게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분들보다 늦게 시작했고 또 중간에 좀 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강론을 써서 올리는 것을 보고는 더욱더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들 쓰시는 내용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매일 올리시는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도 내용보다 그 꾸준함이 더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고 여깁니다. 
 
질이 좋고 멋진 강론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자분들이 저를 통해 주님께서 계심을 믿게 만드는 것은 ‘질 좋은 강론’보다는 ‘지치지 않는 강론’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친 모습을 보이면 그 사제가 그리스도와 맞닿아 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투박하더라도 매일 새로운 강론을 하다 보면 신자분들은 그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새로운 무언가를 무한한 진리이시며 은총이신 분께 받는다는 것을 언젠가는 느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그 말씀이나 은총에 한계가 왔다고 느끼면 더는 표징이 되지 못합니다. 
마치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두려움에 떨고, 빵 자체이신 분이 함께 계신데도 빵을 가져오지 못한 것을 걱정하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양식을 나누어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받아서 전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죽기까지 매일 새로운 강론을 쓸 결심을 다시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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