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시대, 누가 사이비고 누가 정통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이야기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동시에 예수님 공동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공동체를 분별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알아야 합니다. 마르코는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 공동체의 특징들을 제시합니다. 기준이 없다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는 부마자를 분별하는 기준도 제시합니다. 보통 부마자와 정신병을 앓는 사람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몇 가지 특징들을 제시합니다. 부마자가 배우지 않았던 여러 언어를 말하고, 동시에 성물, 성수, 기도문 등에 반응하여 고통스러워하며, 또 교회를 저주하고, 나아가 몸이 붕 뜨는 등의 현상과 괴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마귀 들린 것을 확신해도 좋다고 제시합니다.
이런 기준이 없다면 부마자와 정신병자를 구별하는데 많은 애를 먹어 정신병자에게 마귀를 쫓아낸다고 고통을 가할 수도 있습니다. 타 종교에서 그런 구마를 하다가 사람을 아예 죽인 예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구원의 공동체를 분별할 명확한 기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혼란의 시대, 누가 사이비고 누가 정통인가?”라는 식의 글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처음엔 신천지만 사이비인 줄 알았지만, 일반 사람들의 눈엔 그놈이 그놈이라는 식으로 각인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코로나는 참으로 여러 종교집단의 문제점들을 밝혀냈습니다. 우선 신천지라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단체가 세상에 밝혀졌습니다. 그다음엔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사랑제일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말은 사랑을 제일로 삼는 교회이지만 실제로는 국가에 큰 피해를 줬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BTJ 열방센터, 그리고 IM, 혹은 그 산하 IEM 선교회가 말썽입니다. 학생들을 싼값에 유학 보내준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학원화하여 코로나 시대에 크게 부흥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많이 와서 터져나갈 것 같다고까지 즐거운 비명을 지르다가 집단 감염의 원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이러저러한 목사들의 개인적인 문제들도 TV에 자주 등장하니 이젠 정말 누가 사이비이고 누가 정통인지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일반인들이 믿는 것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마르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어떠한 특징을 가졌는지 말하며 그러한 특징이 있으면 참다운 구원의 공동체임을 믿어도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마르코가 전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특징은 첫째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공동체”여야 합니다. 열두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뽑으시고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십니다. 그러니 본인이 재림예수라 말하는 모든 집단은 그리스도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많은 교회에서도 구마를 하지만 가장 철저하게 악령에 관한 것을 교리화하여 구마를 하는 종교는 가톨릭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검은 사제들’과 같은 영화도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파견하시는 공동체는 정말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합니다. 혼자 특정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에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나주 율리아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한 명씩 파견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번째는 “가난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지팡이나 신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여벌 옷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마태오나 루카는 신과 지팡이도 가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르코는 여행 다니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많이 걷기 위해서는 신도 필수적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어쨌건 여행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을 제외하고는 돈을 모으는 공동체는 주님께서 파견하신 공동체와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돈벌이하는 종교는 거짓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도 조심하여 프란치스코 영성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한 고장에서는 한 집에만 머물라.”라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머물지 생각하여 이집 저집 옮겨 다닌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마음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주교가 정해주는 자리에 떠나라 할 때까지 머뭅니다. 자신이 원한다고 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머무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믿지 않으려 하면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며 떠날 줄 아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그렇게 떠나셨습니다. 부부로 맺어졌다면 싫어도 끝까지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그런 애정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애정에 집착하여 더는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는데도 끝까지 머물려고 고집부린다면 그 사람은 복음보다 애정을 더 중요시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즘 특별히 수도회에서는 성소가 줄어든다고 성소자들에게 지나치게 기울고 심지어 휘둘리는 경향까지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참다운 그리스도의 파견된 공동체의 위엄을 잃습니다.
일곱 번째는 “회개하라고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면 집안이 잘된다는 식의 기복신앙이 아니라 이전의 세속-육신-마귀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공동체가 참된 복음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나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로 향하고,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향하게 만드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처음부터 내 안에 있던 좋은 것을 키워내는 식의 그런 악으로부터의 회개가 아닌 발전만을 말하는 종교는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는 “기름을 발라 병자를 고쳐준다.”라는 것입니다. 여기 기름을 바른다는 것도 마르코 복음만의 특징입니다. 이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사’(聖事)를 의미합니다. 성사는 물이나 기름, 밀떡이나 포도주와 같은 것들로 주님의 은총을 전하는 수단입니다. 마르코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그리고 베드로가 행하는 이 성사들을 보며 참된 공동체는 성사를 통해 은총을 내어주는 공동체임을 본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마르코 복음 사가가 말하는 구원의 공동체는 가톨릭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사이비나 뉴에이지 같은 것에는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공동체는 반드시 그 공동체만의 분별 기준이 있습니다. 어느 공동체에 속하느냐가 구원의 절대적인 요인입니다. 이 기준들을 잘 익혀 절대 속지 말고 또 그 기준의 모습대로 공동체를 쇄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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