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0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두려움 없는 아기처럼>
제가 어렸을 때 개울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수영을 못해서 친구 등에 엎여 있었는데 왠지 수영이 될 것 같아서 그냥 수영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꾸 몸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물 밑으로 내려가니 발이 땅에 닿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차고 올라오면 간신히 물과 공기를 동시에 들이마실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장난치는 줄 알고 저를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물은 계속 입으로 들어오고 이러다 죽는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살아 온 삶이 필름처럼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정말 한 순간에 모든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특별히 후회스러운 일들이 다 기억났습니다.
친구가 저를 구해주기는 했지만 그 때부터 저는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그 때서야 제대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광고에서 아기들이 물속에서 눈을 뜨고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냥 놓아두면 그 아이들은 익사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들의 눈은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온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습니다.
9개월 넘게 엄마 배의 양수에서 살았으니 오히려 물이 더 편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기들이 숨을 쉬게 하기 위해 엄마들은 시간을 재고 있다가 아기들을 들어 올립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속으로 넣어줍니다.
또 아기들은 두려움이 없어서 항상 모험을 합니다.
제대로 일어설 수도 없으면서 걸으려하고 걷지도 못하면서 계단을 오르내리려 합니다.
너무 위험하니 항상 엄마의 시선이 아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계단을 오르려 할 때 엄마는 그냥 번쩍 안아서 올려주고 맙니다.
그래야 안 다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도 조금만 크면 물이 자신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계단에서 구르면 크게 다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그 때는 엄마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자기가 책임져야 할 때입니다.
엄마도 아이들이 위험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할 때 아이들을 놓아줍니다.
무엇이 위험한 줄 알게 되는 동시에 어머니의 시선과 보호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 언제일까요?
바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이후였습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두려워하며 하느님의 시선으로부터 숨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별하게 되었기에 더 이상 악에서 보호해 줄 하느님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서 죄를 짓는 우리들은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곧바로 그 분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죄인이기 때문에 그 분 도움 없이 모든 것을 헤쳐내야 한다는 부모 없는 고아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춘기는 이렇게 자아가 커짐으로써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시기이고, 그래서 가장 불안하고 두려운 시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넘어 막 마을로 가려다가 너무나 밝은 얼굴로 뛰어노는 꼬마를 만났습니다.
“공동묘지 근처인데 너는 무섭지 않니?”
이렇게 묻자 꼬마는 “아뇨.”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습니다.
“왜 무섭지 않지?”
다시 묻자 꼬마는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가 이 묘지 관리인이거든요.”
우리도 살아가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면 영성에 있어서는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부모님의 보호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기들이 물에 빠져죽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항상 부모가 함께 있어주며 보호해 줍니다.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 자체가 하느님께서 보호해 준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오히려 죽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제자들도 심한 풍랑이 몰아치자 막 가라앉을 것 같은 배 위에서 심하게 두려워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지라 두려움을 스스로의 힘으로만 극복하려합니다.
끝까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두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어린이와 같은 믿음이 있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 옆에서 드러누워 함께 잠을 자야했을 것입니다.
아기와 선원인 아버지가 함께 배에 있는데 바람이 조금 분다고 아기가 나서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잠을 청하면 됩니다.
배가 가라앉는다는 것은 곧 아버지의 죽음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으면 나와 함께 같은 배를 타고 계신 예수님도 죽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두려워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겠습니까?
예수님을 깨우고 내가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자야합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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