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찾는 공동체의 특징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초기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 주십니다.
아마 시몬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을 좋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열병을 치유해 주시자 부인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시중을 듭니다.
그녀에게 더는 예수님께서 자기 사위를 빼앗아 간 분이 아니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멍청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많은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질병도 치유해 주십니다.
특별히 마귀가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그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마귀들이 하는 일이란 그저 ‘분열’시키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분열은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됩니다.
마귀는 이를 이용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공동체에 이루시고자 하는 일은 이것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입니다.
모두 찾고 있다는 말은 이제 그 마을 공동체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것 외에 다른 이슈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마음 안에서 모든 분열이 해소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제 됐다.”라고 하시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복음이 전해진 곳은 ‘모두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찾는 것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때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겨울이었습니다.
벨기에 이프르 지역에 100m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독일군, 스코틀랜드군, 프랑스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싸움에 지쳐가던 중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독일군 중 한 명인 슈프링크는 성악가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본부 장교들의 성탄절 이브 축제를 위해 저택으로 불려갔습니다.
슈프링크는 그곳에서 아내를 만납니다.
같은 성악가 출신인 아내와 함께 장교들을 위해 성탄 노래를 불러줍니다.
하지만 슈프링크는 다시 참혹한 전쟁터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고생하는 데 자신만 호화로운 축배의 잔을 들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쟁터로 돌아온 슈프링크는 각 나라 군인들이 자신들 나름대로 성탄을 즐기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술을 한 잔씩 건네며 성탄 노래를 불렀습니다.
스코틀랜드 진영에서는 백파이프로 연주되는 성탄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각 나라 군인들은 그 음악에 맞추어 각 나라말로 성탄 노래를 불렀습니다.
슈프링크는 참지 못하고 참호 위로 뛰어올라 그 음악에 맞추어 성탄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총을 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며 총부리를 겨누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은 것은 높은 사람들의 이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념의 희생양들일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사실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몰랐습니다.
세 진영의 장교들은 각자의 참호에서 나와 함께 만납니다.
그리고 오늘 성탄 이브와 내일 성탄절은 총을 쏘지 말자고 합의합니다.
그리고 모든 군인은 함께 모여 성탄 성가를 부르고 미사에 참여합니다.
언어는 달랐지만, 모두가 그리스도교인이었고 그리스도면 충분했습니다.
각자가 주장하던 잘잘못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은 진영 사이에 있는 전우들의 시체를 서로 찾아 묻어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성탄절이 지나도 서로 총을 쏠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된 각 나라의 장교들은 그들을 문책했습니다.
또 그들에게 미사를 해 준 사제도 문책을 당하였습니다.
사제는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교의 말에 사제직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군인들은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더 참혹한 전쟁터로 옮겨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으로 가면서도 성탄의 노래를 부릅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이는 실화이고 이 전쟁터에서 꽃핀 성탄의 기적은 여러 버전의 영화로 많은 이들에게 아직도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한 공동체가 누가 옳으니, 누가 그르니 하는 말들을 들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은 그 옳고 그름이 해결되면 그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가 될 것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그런 싸움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다른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옳고 그름을 주장할 때 예수님은 필요 없는 공동체입니다.
반면 오직 평화와 일치만이 옳은 가치이고 지금 싸우고 있는 이유가 악의 영향 때문임을 알 때 예수님께서 필요한 공동체입니다.
분명 독일군이 전쟁을 시작했으니 옳지 않고 그들을 방어하는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은 옳아 보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죽이는 전쟁은 그냥 모든 이들을 잘못된 삶으로 몰아넣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고자 하시는 것은 그 옳고 그름의 이면에 있는 평화입니다. 사랑이고 일치입니다.
이 일치는 이념을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 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금지하셨을까요?
그것들이 하는 말이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깨닫게 만들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옳고 그름은 그리스도 앞에서 의미를 잃습니다.
그분은 사랑이고 평화이고 일치입니다.
이것을 깨뜨리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고 악입니다.
이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그리스도 때문에 일치를 이룬 공동체는 자신들의 이념을 넘어서게 하는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 그분께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 가정, 우리 본당, 우리 단체는 서로 옳고 그름으로 갈라지는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넘어 일치와 평화를 추구하는 공동체입니까?
옳고 그름을 넘어 서로 이해하고 오직 일치만을 가치로 삼는 공동체라면 예수님을 만난 공동체이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아니면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로 분열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찾는 공동체의 특징은 그리스도 외에는 찾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 옳고 그름의 싸움이 멈추고 그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와 일치만이 존재합니다.
그런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찾는 공동체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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