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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1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1-12 조회수 : 2501

가르침이 권위를 잃는 이유: 본질을 꿰뚫지 못하기 때문 
 
첫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신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을 시작하시며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전파자의 권위는 ‘성령’입니다. 성령만이 악령을 쫓아낼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며 놀라워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고 악령은 성령으로 쫓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말에 성령의 힘이 더해지면 사람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게 되는데 그런 가르침이라야 권위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위가 없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가르치기는 하는데 악에서 구하는 가르침이 아닌 경우입니다.
악에서 구하는 가르침이 아니라면 결국 그 가르침은 권위를 잃게 됩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전설 중에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한 생쥐가 고양이가 너무 무서워 고민하다가 뛰어난 능력을 갖춘 마술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도움을 구했습니다. 
 
“마술사님, 저는 고양이가 너무 무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마술사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생쥐를 불쌍히 여겨 생쥐를 고양이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갔습니다. 
 
“마술사님, 제가 고양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개가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자 마술사는 고양이가 된 생쥐를 다시 개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개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간 것입니다. 
 
“마술사님, 개가 되고 보니 이제는 사자가 너무 무섭습니다.”
할 수 없이 마술사는 개가 된 생쥐를 사자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제 동물의 왕인 사자가 되었으니 더는 무서워하지 않겠지!’ 하고 마술사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마술사님, 제가 사자가 되고 보니 이제는 사냥꾼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덩치 큰 사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는 생쥐를 어이없이 쳐다보던 마술사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너는 몸은 사자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생쥐의 마음이구나.
그러니 다시 생쥐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이 우화에서 멍청한 대상은 쥘까요, 마술사일까요?
저는 마술사가 더 멍청해 보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해주지 않고 겉도는 가르침만 주어 자신은 잘났고 쥐는 여전히 못난 것만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훌륭한 마술사라면 쥐의 두려움을 빼내 주려 노력했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의 말이 잔소리가 되는 것일까요?
아이에게서 본질적인 악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게임 좀 그만하고 공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아이는 게임을 끊고 공부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래 봐야 행복하지 않습니다. 
 
게임을 하는 아이는 게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을 하게 시키는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게임을 포기하고 공부를 해봐야 결국 자아로부터 해방되지는 못합니다.  
 
공부도 게임과 다를 게 없습니다.
경쟁 속에서 자아에 여전히 사로잡힙니다. 
 
그렇다 보니 부모의 말은 결국 진짜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다음부터는 부모의 말이 권위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어 봐야 참으로 자아에게서 벗어나는 평화는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입교를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입교 이유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세상살이의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사실 마음의 평화를 더 받을 수 있는 종교는 불교입니다.
불교는 삶의 고통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의 철학적 통찰을 제시합니다.
붓다가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를 닦은 결과물들이 교회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평화를 찾는 이들에게는 불교의 가르침이 더 신통하기만 합니다.
가톨릭교회에 입교해서도 결국에는 스님들의 가르침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는 평화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악령에게서 벗어나게 만드는 가르침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악령이 나와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에 있습니다.  
 
사실 내 안에 있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자아내는 자아도 악령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악령과 같이 되는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는 평화는 이 악령에서 벗어나서 얻는 평화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가 곧 ‘악’이란 뜻일까요?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주님의 기도 중 “악에서 구하소서”에서의 ‘악’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교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한 위격, 곧 사탄, 악마, 하느님께 대항하는 천사를 가리킨다.
‘악마’(dia-bolos)는 하느님의 계획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가로막는’ 자이다.”(285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의 평화도 지키려는 발언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인간도 자기 생각에만 집중하면 사탄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말씀에 권위가 있으려면 당연히 악령으로부터도 사람을 구할 수 있어야 하지만,
더 보편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과 동침을 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마음의 평화만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마귀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내 자신이 곧 마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 참 해방인지 먼저 신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악으로부터 해방해 주려는 말을 할 때 권위 있는 가르침이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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