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주보
게시판 > 보기
오늘의 묵상
1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1-09
조회수 : 2099
1월9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복음: 요한 3,22-30 어디를 향하는 길이 될 것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함께 주고 있을 때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고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로 가기 위한 준비단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두 세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요한이 질투를 할 것 같아서 그리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질투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요한은 신부가 신랑에게로 향하는 ‘길’과 같은 존재란 뜻입니다. 길은 두 갈라진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고 싶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길은 그래서 돋보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길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되고 목적지로 빨리 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신랑의 친구,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려면 바로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가기 위해 밟고 지나가는 그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록 지금은 작아질지언정 영원한 분으로부터 영원히 사랑받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이들을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검은 돌들이 사는 산동네가 있었습니다. 이 돌들은 로마 시대에 길을 만드는 데 쓰였습니다. 두 친구 돌들도 서로 미래에 어느 길이 될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멋지게 생긴 돌이 친구 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황제가 다니는 길이 될 거야. 비록 돌에 불과하지만, 황제가 다니는 길은 인간들도 부러워한다고. 너는?” “나는 잘 모르겠어. 뭐 필요한 데 쓰이겠지. 너야 평평하고 단단하니까 임금이 다니는 길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울퉁불퉁 못 생겨서 황제의 마차가 다니기에 적합하지 않거든.” 드디어 인부들이 와서 두 돌을 파냈습니다. 역시 황제가 다니는 길에 친구 돌이 먼저 박혔습니다. 서로 헤어지며 둘은 슬픈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황제를 ‘네로’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황제의 마차가 자신의 머리 위로 지나갈 때는 조금 고생스럽기는 해도 사람들의 함성과 꽃이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차가 지나갈 땐 머리가 좀 아팠지만 그래도 영광을 받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울퉁불퉁한 돌은 사람이 밟고 지나다니는 시골길에 박혔습니다. 그런데 그 길 위로는 죄수들이 피를 흘리며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처형되는 사람들이 끌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돌이 평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족쇄를 찬 사람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지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바오로라고 부르는 죄수가 또 그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돌에 그 사람의 피가 떨어졌습니다. 돌은 고개를 들어 바오로라는 죄수의 목이 세 번 튕긴 자리에서 샘이 솟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황제의 길로 사용되었던 친구 돌은 마차 바퀴에 갈려져서 더는 쓸 수 없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위에 흙을 덮고 새로운 돌들로 새로운 길을 만들었습니다. 잠깐 황제의 길이 되었던 친구는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형장의 길이 되었던 돌은 사형 집행이 더는 이뤄지지 않았기에 시골에 가난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로 아직도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둘레에 줄을 쳐서 사람이 다니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에서 기도하고 찬미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자신에게 뿌려졌던 바오로의 피가 성인의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 박힌 돌은 2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보면 어떤 길들은 ‘비아 아우렐리아’처럼 그 길을 만든 황제의 이름으로 여전히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비아 그리스도’입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죽었지만 여전히 그 황제가 기억되는 곳에서는 그 황제가 만든 길이 그 황제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로부터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향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밟고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그 길을 간 그분의 신부가 영원히 그 길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아 영원히 사는 방식입니다. 나를 거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세속-육신-마귀의 자신을 죽이고 샘이 솟게 하는 바오로의 삶을 살게 됩니까, 아니면 세속-육신-마귀를 쫓는 네로 황제의 삶을 살게 됩니까? 우리가 세례자 요한과 같아지려면 어떠한 길이 되어야 하는지 명명백백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