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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1-03 조회수 : 2135

1월3일 [주님 공현 대축일] 
 
복음: 마태오 2,1-12  
 
생존하려는(to be) 사람에겐 당신을 감추시고
살려는(to live) 사람에겐 당신을 드러내신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지를 묵상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만큼 귀중한 일은 없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이제 주님께서 나의 ‘삶의 의미’가 됩니다. 
 
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할까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으면 그냥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생존하는 사람의 특징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혹은 이 세상에서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때문에 나도 죽고 이웃도 죽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릴 적 길을 잃어 남의 집의 식모로 키워졌습니다. 
그 집은 어머니를 학교도 보내지 않고 일만 죽도록 시켰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생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건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성당엔 보내주었지만,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하도 모질게 당신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타서 죽이고 당신도 죽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은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며 이런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얼굴과 손발이 문드러진 저 나병 환자들을 보아라. 
저런 사람들도 사는데 넌 무엇이 모자라 죽으려고 하느냐?” 
 
어머니는 그 사건 이후로 삶의 의미를 찾으셨습니다. 
사람의 부모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창조해주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살게 되셨습니다.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생존합니다. 
생존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이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만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존이 목적이 되는 이유는 ‘창조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태어나면 생존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모를 만나면 살아갑니다. 
그들은 ‘내가 왜 생존하는가?’를 묻습니다. 
부모를 보며 ‘아, 부모가 낳아주었으니 사는 거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를 위해’ 생존합니다. 
나를 창조해 준 부모를 위해 살 때 동물적 생존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부모가 더는 ‘사는 이유’를 주지 못합니다. 
부모가 진짜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냥 살아가면 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존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저희 어머니처럼 창조자를 만난다면 삶의 의미를 알아 그분 때문에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그래서 살기 위해 창조자를 찾는 일은 얼마나 중요할까요? 
하지만 대부분은 찾지 않습니다. 그저 생존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가 그런 사람입니다.  
 
반면 동방박사들은 살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조자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만나 참으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이영표 선수의 간증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브라질 월드컵을 마치고 굉장히 피곤한 상태에서 꿀맛과 같은 2주간의 휴가를 한국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강원도 어느 곳에서 청년들을 위한 강연이 들어왔습니다. 
그가 관심 있어 하는 북한 이탈자 청년들도 온다고 했습니다. 
그는 며칠을 생각하다 도저히 피곤해서 갈 수가 없다고 통보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잘 아는 목사님의 사모가 우연히 자신을 방문했고 또 우연히 북한선교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영표 선수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다시 강연하겠다고 연락했습니다. 
 
강연 내용은 그리 감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해도 끝까지 참고 견디면 성공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맨 앞의 한 청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마지막 질문을 그 청년에게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영표 선수는 왜 저희 탈북자 청년들을 좋아하세요?” 
 
이영표 선수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뒤 그 청년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 청년은 그때 자신이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북한을 나와 남한에 왔는데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를 때 하느님을 안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월드컵을 보며 이영표 선수를 한 번 만난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청년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청년이 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이 의미는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진짜로 만날 때 찾게 됩니다.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게 될 때 진짜 살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생존의 삶을 넘어서고 싶어 해야! 합니다.  
 
참삶의 의미를 위해 생존의 도구들을 포기하는 모습이 바로 ‘봉헌’입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가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지니고 강연에 왔던 것이고 하느님은 그런 동방박사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면 더는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며 생존하게 만드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이 때 부모가 삶의 의미가 되어 그렇게 행복했던 것처럼, 나이가 들어도 하느님을 만나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투자’하는 방법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표징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희망이 되는지, 아니면 고문이 되는지가 우리가 헤로데의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려는 사람인지 동방박사인지를 결정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느님을 찾는다는 증거로 준비해 온 선물이 십일조와 같습니다.  
 
황금은 세속(돈)을, 몰약은 육신(쾌락)을, 유향은 마귀(교만)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세속-육신-마귀를 선택하여 주님께 바치기를 거부한 ‘선악과’와 같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지, 아닌지를 판별합니다. 
 
청년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연습을 시킨다면 청년들은 자신들의 창조자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 투자하는 만큼 주님은 당신을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면 청년들은 이제 생존을 위해 사는 동물과 같은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 힘차게 살아가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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