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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1-02 조회수 : 2258

1월 2일 토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복음: 요한 1,19-28 
 
자녀임을 포기할 때 얻을 수 있는 참 자녀의 자격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은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며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밝힙니다.
몇몇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명확히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대답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 누구나 “너는 누구냐?”란 질문을 받을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하늘나라 상속권을 받으려 할 때 야곱에게 이사악이 누구냐고 물어본 것과 같습니다. 
그때 하느님과 관련된 정체성이 나와야지 이 세상 부모와 관련된 대답이 나오면,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어떤 도움도 받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나와 사귀는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받으면 그의 정체성에 내가 조금 개입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결혼해서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라고 대답하는 것은 이미 둘이 한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혹은 ‘누구의 자녀’, ‘누구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그것과 섞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정체성이 바뀐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나 엘리사벳이 있었다면 마음이 어땠을까요?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자신들의 이름이 조금이라도 거명되었으면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부모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면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과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끌어주신 분, 그래서 너무 작아져 자녀에게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 분들이 
바로 요한의 부모들입니다.  
 
그들은 요한을 하느님 것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위대한 부모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서 자신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위대한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러기 위해 더 큰 부모가 주는 정체성으로 자녀를 인도해야 합니다. 
내가 준 정체성 안에 자녀를 가두려 하면 자녀도 죽고 자신도 죽습니다. 
 
전설적인 흥행을 기록했고 성탄절이면 여지없이 TV에 방영되었던 ‘맥컬리 컬킨’의 영화는 무엇일까요? 
누구나 다 ‘나 홀로 집에’임을 알 것입니다. 성탄절마다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의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모였습니다. 
특별히 아버지였습니다. 
 
맥컬린 컬킨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과 7남매가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교회를 관리했고 어머니는 전화 교환원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 돈으로 7남매를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여운 외모의 맥컬리 컬킨을 아역배우로 쓰기로 합니다. 
아버지도 예전에 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었고 그쪽에 인맥이 있었기에 기회만 되면 아들을 무작정 출연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전국적으로 흥행한 ‘아저씨는 못 말려’라는 영화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나 홀로 집에’가 제작됩니다. 
예상외로 엄청난 흥행을 하고 ‘나 홀로 집에 2’는 그것보다 40배 이상의 출연료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는 교회 관리인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아들의 매니저가 됩니다. 
아버지는 이제 할리우드에서 흥행 보증수표인 아들 덕분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인에 들어갑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아버지의 욕심은 날로 커져만 갑니다.  
 
다른 자녀들을 맥컬리와 함께 써달라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고, 맘에 안 드는 대사는 고치지 않으면 
아들을 출연시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망치기만 해봐. 맞을 줄 알아!”라고 협박을 하곤 했습니다. 
맥컬리는 아버지와 함께 단둘이 호텔 방에 묵는 것이 감옥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혹사합니다. 
7년 동안 무려 17편에 달하는 엄청난 영화를 찍습니다. 
정신이상자 연기, 욕설이나 담배를 피우는 연기 등 닥치는 대로 시킵니다. 
이렇게 되자 맥컬리의 연기 의욕은 빠르게 저하되었고, 대부분이 흥행에 참패하게 됩니다. 
그러자 더는 맥컬리를 찾는 감독이 없어졌습니다. 
아버지에게 맥컬리는 더는 유용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부모는 이혼소송에 따른 양육권 분쟁을 하는데, 맥컬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해서 양육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내가 벌어들일 돈을 생각해서 싸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애 가장 좋았던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나서야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아들을 공식적으로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하는 학교생활, 대인관계는 쉽지 않았습니다. 
17살에 결혼하고 거의 바로 이혼하고, 방황하고, 술과 마약 등에 찌들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큰 흥행은 못 하지만 조금씩 부모의 압박에서가 아닌 자유의지로 연기를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출처: ‘크리스마스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맥컬리 컬킨의 인생’, 달빛 부부의 영화와 미드, 유튜브] 
 
물론 좀 심한 부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조금은 자녀들이 나의 테두리에 있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면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명확히 대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부모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 아무리 커도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 어디까지 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부모를 위해서라도 부모가 준 정체성을 넘어서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자주 되뇌고 다닙니다. 
저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저의 머리로 사시기 때문에 저는 그분의 몸만 되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제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부모님도 저의 이 정체성 안에서 보게 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 때문에 변화된 정체성은 지상의 부모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만듭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하고 자신 또한 자녀를 통해 영광을 받고 싶다면 자녀에게 인간으로서 주는 정체성이 아닌 하느님을 부모로 둔 정체성을 가지도록 이끌 필요가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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