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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2-19 조회수 : 1522

술을 좋아하면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힘들다 

 

 

오늘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세례자 요한 탄생을 예고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메시아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한 소명으로 오는 분입니다. 

이렇게 태어날 때부터 성령의 이끄심으로 주님의 뜻에 봉헌된 사람을 ‘나지르인’이라 불렀습니다. 

 

민수기 6장에 나지르인의 규정이 나옵니다. 

나지르인이 지켜야 하는 가장 큰 규정은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을 주님에게 봉헌하기로 하고, 특별한 서원 곧 나지르인 서원을 할 경우, 그는 포도주와 독주를 삼가야 하고, 포도주로 만든 식초와 독주로 만든 식초를 마셔서는 안 된다.”(민수 6,2-3) 

 

또 하나의 규정은 머리카락을 잘라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은 “하느님에게 봉헌한 표”(민수 6,7)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와 접촉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의 주검으로 자신을 부정하게”(민수 6,7) 만들기 때문입니다. 

 

봉헌 기간이 다 찼을 때는 이 법을 따르지 않아도 되지만 

봉헌 기간 내에는 꼭 지켜야 하는 규정입니다. 

 

머리카락은 삼손의 예에서 보듯이 ‘성령’을 상징합니다. 

머리카락이 잘리면 ‘영과 힘’을 잃습니다. 

머리카락이 잘리게 되는 이유는 분별력이 사라져 누가 죽은 사람인지, 산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술’ 때문입니다. 

술은 분별력을 잃게 만들어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드는 어두운 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천사는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술과 성령은 반대입니다. 술을 마시면 성령의 힘이 줄어듭니다. 

하느님의 뜻과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 현실을 성령의 힘으로 이겨나가기를 원하시고, 이것을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술로 현실에서 도피하려 듭니다. 

술은 성령의 힘을 믿지 않는 사람의 현실도피 방법입니다. 

문제는 술이 깨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저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컸던 대학생 때 술을 가장 많이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불안함을 잊기 위해 술에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더 마셨을 때는 사제 성소에로의 부르심을 느낄 때입니다. 

사제가 되면 잘 살 수 있을지 몰라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토할 정도로, 기억이 끊길 정도로 여러 번 마셨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술을 마시는 것은 자아에게 고삐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아의 욕구를 인정하고 자아의 종이 되는 예식과 같습니다.  

 

술을 마시면 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증가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성령과 반대가 됩니다. 

성령을 술과 비교하는 이유는 성령을 받으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술을 마시면 자아에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술은 반대로서 술을 마시면 성령의 힘을 잃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성령의 힘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고, 성령의 힘에 사로잡혔으면서 술에 의지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술에 취하는 삶은 저절로 줄어듭니다. 

술은 성령의 뜻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아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마시는 것입니다. 

 

전성민의 『한 번이라도 모든 걸 걸어본 적 있는가』란 책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 중 20%는 대량의 헤로인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전쟁이 끝나고 100만 명이나 되는 마약 중독자들이 본국으로 다시 돌아오면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군인의 95%는 어떠한 도움도 없이 약물 사용을 멈추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금단현상도 없었고 심지어 재활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전쟁이라는 현실이 두려워 헤로인을 통해 그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아무리 헤로인을 끊으려 해도 쉽지 않습니다. 

그 현실을 헤로인 없이 받아들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시 전쟁 밖으로 나왔을 때는 더는 헤로인으로 현실에서 도피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것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환경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술도 이처럼 줄여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전쟁터와 같이 느껴진다면 사람을 만나면서도 그 두려움으로 술을 많이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힘이 줄어들어 더욱더 관계가 악화될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성령만이 이 현실을 직면하고 살아갈 힘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방법이 음주라면 이와 똑같이 하느님의 뜻에 고삐를 내어주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성령이 많아질수록 현실을 당당히 이겨나갈 힘이 넘칠 것이고 그러면 자동으로 술의 필요성이 줄어들 것입니다. 

 

저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런 묵상을 쓸 자격이 없습니다. 

저도 처음엔 청년들에게 술을 사 주며 성당에 많이 나오도록 유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술로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들며 동시에 성령의 힘을 믿게 하려는 것은 모순입니다. 

테스토스테론을 주사하며 여성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게 하려고 성령으로 가득 차야 했던 세례자 요한은 술을 마시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성령의 힘을 믿게 됩니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굳이 술을 어느 정도 마셔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다음 날 안 마신 것처럼 가뿐할 수 있을 정도’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음주운전이 안 될 정도’로 마시면 좋습니다. 

거의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술이 술이 아닌 음식으로 마시는 정도일 것입니다. 

 

어쨌든 저도 술 때문에 성령의 힘을 잃고 자아에 휩싸일 때가 있고,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세례자 요한처럼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술을 안 마시면서도 천국을 사는 사람이라야 많은 이들을 주님께 불러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누가 지금 성령으로 천국에 살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현실에서도 천국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술에 의존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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