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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12-08 조회수 : 1419

12월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루카 1,26-38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공경할 수 있을까?
 
 
성모님은 잉태되실 때부터 죄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이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죄가 없는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우선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꼬시는 뱀의 말을 듣기 이전의 상태일 것입니다.
 
뱀은 어떠한 욕구를 자아내어 선악과를 따먹게 했을까요?
선악과를 바치지 않은 것은 더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세속’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더 먹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욕심은 결국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뱀은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으로 첫 조상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유혹이 없을까요?
우리 안에 뱀 한 마리씩 다 있습니다.
우리가 그 뱀을 뱀인 줄 모르고 인정하며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하와가 아무 생각 없이 뱀과 대화하는 것이 죄의 시작인 것처럼,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나를 나로 인정하는 것이 원죄의 시작인 것입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모든 욕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아기가 ‘나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비로소 두 발로 서고 싶고 말을 하고 싶은 욕구가 발동합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욕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은 자기 혼자서는 가질 수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 없이 홀로 무인도에서 살아남아 자신이 사람인 줄 깨닫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두 발로 걷는 일도 없습니다.
 
따라서 죄란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에 대한 잘못된 해답을 가짐으로써 시작됩니다.
우리가 원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나는 나야!’란 믿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라고 생각하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세속-육신-마귀의 모든 욕구가 정당화됩니다.
그러니 돈을 좋아하는 마음과 성욕과 남을 판단하는 마음이 절제되지 않습니다.  
 
‘나는 나’라는 믿음은 자신이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나는 왜 이리 돈이 부족할까? 왜 이렇게 맛이 없어? 짜증나네.
저 인간은 나한테 왜 이래?’라는 생각들은 다 ‘내가 하느님인데!’라는 교만을 근저에 깔고 있습니다.  
 
내가 뭔데 돈이 꼭 많아야 하고 내가 뭔데 꼭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며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남을 심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내가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여기고 생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그렇다면 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시스템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나’라는 믿음 => 불만족의 감정 => ‘선악과를 왜 바쳐야 하는가?’라는 생각 => 선악과를 자신이 먹고 아담에게도 권하는 행동
 
‘믿음(영) => 욕구 => 감정 => 생각(혼) =>행위(육체)’의 순서대로 우리가 작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재확립하는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곧 욕구”입니다.
자기 정체성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내면에서 저절로 바뀌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육체를 통해 생각으로, 생각에서 감정으로, 그리고 그 감정이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변화시키게 만들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음식을 주면 그것이 배를 불리고
그러면 사랑받는다고 생각이 들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 좋아진 기분은 ‘내가 나’라기보다는 ‘부모의 자식’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내 맘대로 살지 않고 ‘부모의 뜻’에 따라주고 싶은 욕구가 생겨납니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는 마음이 만족스럽지 못하여
이 만족을 위해 생각이 작동하고 그 생각대로 몸이 움직입니다.
이것이 변화의 시스템이자 과정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먹이시고 가르치십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입과 귀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리면 그것이 생각을 거치며 내 안에서 정리됩니다.
그 생각이 기분을 좋게 만듭니다.  
 
그 평화로움을 통해 우리는 내가 이 지상의 부모의 자녀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마음이 발동합니다.  
 
이 욕구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와 반대됩니다.
나를 죽여 그 살과 피를 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죄로 만들어버리는 이기적 욕구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갖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죄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가 없으셨다는 말은
처음부터 하느님과 하나라는 믿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뱀의 유혹에 절대로 물들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원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원죄에서 벗어나려면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상태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하는 것이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바치면 세속적 욕구만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육체적 욕구도 절제되고 하느님처럼 되려는 교만도 절제가 됩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 근접하기 위해
‘십일조를 회복하는 것보다 더 급선무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를 우리나라의 수호자로 모시면서도 우리는 십일조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그분이 지켜주시기만을 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누구든 그 사람의 뜻을 따라주고 있지 않다면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아집니다.
이는 성모님도 그렇고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시니까 우리를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녀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진짜 자녀를 자녀기 때문에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뜻’이 들어있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몸 안에서는 수정된 난자가 75%나 착상하지 못하고 그냥 빠져나갑니다.
어떤 엄마가 자신의 자녀가 될 가능성이 그렇게나 많지만 그렇게나 많이 빠져나가는 그 수정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까?  
 
하지만 아기가 뱃속에서 커갈수록 더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잘 커달라는 엄마의 뜻이 아이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처럼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수정하여 100명의 킬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시다.
이 무자비한 킬러들이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다닙니다.  
 
부모들은 그저 자신들의 유전자를 100% 가지고 있다고 그 자식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못 사랑합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도 사랑 자체이시지만 당신의 뜻을 아주 조금이라도 따라주는 이들만 사랑하십니다.
 
성모님을 기리는 날이면 성모님께 기쁜 결심을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은 선악과를 절대로 먹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선악과는 주님께 당연히 바쳐야 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십일조로 굳어졌으며 예수님도 그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속-육신-마귀에 집착하면서 그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공경한다면 그분은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원죄가 선악과 때문에 시작되었다면 성모 마리아에게 기쁨을 드리는 진정한 일은 우리도 그분처럼 봉헌을 배워나가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기가 사람임을 믿었다가 걸음마로 수천 번 넘어지면서도 조금씩 발전하는 자신을 보며 그 믿음을 견고하게 해나가듯,  
 
우리도 우리가 바치는 십일조를 보며 우리가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집니다.
하느님은 물론이요, 성모 마리아께 사랑받는 유일한 찬미의 길인 십일조를 봉헌하면 나머지 모든 것도 주님 것임을 믿으며 살겠다는 결심을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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