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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12-07 조회수 : 1396

12월7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5,17-26 
 
​고해성사가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과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내용은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시며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십니다. 
 
당시 ‘병’과 ‘죄’는 하나였습니다. 병이 죄에서 기인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낫게 하는 것이나 죄를 용서하는 것이나 매한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병을 고칠 기적을 할 수 있음은 믿어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일까요?
그러면 너무 쉽게 죄를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용서받으면 자신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가 없어집니다.  
 
용서받으면 용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는 죄를 짓지 못할 것을 압니다.
죄를 짓는 것 안에는 반드시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가서 운전병 훈련을 받을 때 어떤 바람둥이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수십 명의 여자와 잠자리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온 저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이 스물이 갓 넘어서 50명 넘는 여자와 사귄 것입니다.
그의 집은 꽤 부자였고 부모는 커다란 식당을 몇 개 하고 있었으므로 밤늦게까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자들을 집에 데려와서 그런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어 보였습니다. 
 
제가 그러면 첫 경험은 언제냐고 물으니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마구 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가 당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누나가 자신을 데리고 가서 첫 경험을 했는데 그 누나는 아무 남자나 데리고 가서 잠자리하는 평판이 아주 안 좋은 그런 여자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첫 경험이 그런 여자에게 빼앗긴 것이 그의 마음속에 큰 분노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누나와 똑같은, 아니면 더 나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언젠가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야 할까요?
자신의 결심으로 그런 삶에서 되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먼저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가 그런 문란한 삶을 사는 힘은 자신을 더럽혔다고 믿는 그 누나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자신이 지금 짓는 죄들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누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항상 그 분노가 또 다른 죄를 쉽게 짓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누나를 용서하면 그런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먼저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그 죄의 원인인 누나를 용서하겠다는 말은, 마치 속옷이 더러워서 겉옷으로 그것이 나타나는데 겉옷을 벗지 않고 속옷을 갈아입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겉옷을 벗어야 속옷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여자에게 다 찾아다니며 용서를 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 찾지도 못할뿐더러 모두에게 용서를 얻어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가서 용서를 청해야 할까요?
이때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표징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하였을 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려면 그 사람이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그 표징을 먼저 찾습니다.
아내와 다투었다면 남편은 장인·장모에게 먼저 용돈을 드리고 옵니다.
그러면 그 소식을 들은 아내는 남편이 들어올 때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맞이합니다.
그때 남편은 자신이 잘못한 것의 용서를 청합니다.
아내의 용서 사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거절당할 수도 있기에 그러한 사인이 없이 무조건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표징은 바로 ‘병이 치유되는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을 인간에게 맡겼다면 인간을 통해서도 죄를 용서해주시겠다는 표징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병을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고 그것을 믿으라고 기적을 행하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자녀가 부모가 주는 밥은 매일 먹으면서 부모가 자신은 용서하지 않는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를 보면 둘을 알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었어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인간에게 주실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의 힘으로 기적도 일으키고 죄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께서 그 안에 앙꼬와 같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빼고 주셨다고 말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깎아내리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개신교도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병을 치유하는 기적의 능력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쉬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주시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사실 기적을 행하기보다 더 쉬움을 압니다.  
 
우리는 기적은 못 해도 이웃의 잘못을 많이도 용서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더 쉬운 것은 안 주시고 더 어려운 기적의 능력만 주셨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다 주시지 못하는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며 직접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청합니다.
이런 오류를 통해 진짜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지금 지은 죄를 분명히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또 누군가를 용서하는 힘이 됩니다.
대부분 우리가 짓는 죄의 근저에는 부모가 마땅히 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랑을 받지 못한 분노가 있습니다.
결국, 그 분노의 불을 끄기 전까지는 지금 짓는 죄들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 분노 때문에 지은 죄들부터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뿌리도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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