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4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오 9,27-31
당연한 칭찬도 받지 마라
오늘 복음은 눈먼 사람 둘을 치유해주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눈먼 사람 둘은 영적으로는 믿음의 눈을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자 이렇게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 혹은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비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단단히 이르십니다.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도대체 다윗의 자손이 당신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일이 알려지는 것이 무엇이 문제기에 이렇게 단단히 함구령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분명 그 함구함도 사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상대에게 들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들어 높이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과분한 사람이라 느낄 때 사랑은 그 순간에 끝장납니다.
사랑은 겸손과 단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라는 시각을 잃지 않기 위한 쉼 없는 싸움입니다.
영화 ‘러브 & 드럭스’(2010)는 제약회사 말단 직원과 어여쁜 한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약회사 말단 직원인 남자 주인공은 점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본사 이사까지 노리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식당 아르바이트하는 여인은 파킨슨병으로 몸이 점점 굳어갑니다.
여자는 자신이 그 남자에게 맞지 않음을 깨달아갑니다.
남자도 약을 파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여자친구 하나 고쳐주지 못하는 것에 피폐하여 갑니다.
그렇게 여자는 자신 때문에 망가지는 남자를 볼 수 없어 떠나고, 남자도 그 이별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본사로 가기 위해 이사를 해야 하는 날, 남자는 처음 여자와 사귈 때의 동영상들을 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지금 떠나면 영영 그녀와의 행복한 시절은 오지 않습니다.
남자는 버스를 타고 가는 여자를 잡기 위해 차를 몰고 갑니다.
버스를 세우고 그녀에게 고백합니다.
그녀가 오히려 자신에게 과분한 존재라고.
이렇게 사랑이란 상대가 자신에게 과분한 존재임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나를 칭찬하고 들어 높이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내가 상대의 발을 닦아주려고 해도 상대가 나의 발을 닦는 분위기에서는 그러기 힘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메시아로, 또 당신을 왕으로 떠벌리려는 두 사람을 말리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발을 씻어주러 오셨습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메시아로서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메시아로, 왕으로, 하느님으로 찬미해야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 자신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면 사랑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당신 영광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을 높이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받을 영광은 받으십니다.
하지만 내가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것과 “당신들이 나를 그리스도라 인정하시오!”라고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미 그리스도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런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어 자신을 열등하게 여기는 사람만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알아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느냐입니다.
김하종 신부님이 가난한 이들에게 몸을 바치기로 한 하나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그분의 책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에서 직접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요즘처럼 날이 좋은 1992년 가을에 찾아왔다.
당시 나는 성남 중원구 상대원동에서 빈민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다.
독거노인들과 장애인들을 방문하여 돕는 것이 내 담당이었다.
어느 날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 한 분이 사는 집의 주소를 알게 되었다.
종이에 적힌 주소를 찾아 도착한 곳에는 아주 오래되고 낡은 집이 있었다.
어둡고 곰팡내가 가득한 지하로 내려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 열려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에 흐릿한 전등 하나만이 보일 뿐이었다.
너무 어둡고 덥고 냄새가 나서 몇 초 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보니 방바닥에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누워 있었다.
아저씨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20대 때 사고로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30여 년을 이 지하에서 살고 있었다고.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물었더니, ‘옆집 사람들이 기억해서 주면 먹고 아니면 굶어요’라고 했다.
당시 한국의 사회복지는 많이 발전하지 못해서, 이런 분들은 도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30여 년 동안 혼자서 그렇게 살아온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뭐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아저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더니, 방을 정리해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방에 있지도 않고 있다고 해도 갈 수도 없는 화장실을 대신한 아저씨의 요강을 정리하고,
방 청소와 설거지를 했다.
그 후 다시 이야기하기 위해 바닥에 앉았다.
그때 갑자기 아저씨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라고 했고, 아저씨는 흔쾌히 ‘네, 신부님.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아저씨를 안는 순간,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 음성이 들렸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이 음성이 예수님의 메시지임을 확신했다.
이 음성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상상이나 환청인지는 아직 잘 모른다.
그러나 그날부터 특별히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다.
안나의 집을 찾아오는 사랑하는 친구들 한 명 한 명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상처’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나는 매일 예수님의 상처를 모시고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숙인 친구들을 볼 때마다 힘들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고 기쁘다.
또한, 오늘도 변함없이 예수님의 상처를 모실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드린다.”
저도 노숙인 무료급식 처에서 봉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에게 무언가 해주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소경이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넘어서 ‘저들이 누구인가?’로 가야 합니다.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상처로 보일 때 그들에게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데 전념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이 시작되는 터닝포인트입니다.
사랑은 누가 먼저 발을 씻겨주어야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면에서 당연한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항상 모든 이들을 아버지처럼 대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아무리 당연한 칭찬이라도 받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당연한 칭찬이라도 받는 것을 즐기면 사랑을 위한 경쟁에서 먼저 패배하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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