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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1-29 조회수 : 1107

11월29일 [대림 제1주일] 
 
복음: 마르코 13,33-37
영혼의 배고픔을 느끼면 깨어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대림절은 오시는 예수님을 잘 알아보고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기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인데,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 깨어있음을 ‘일’과 연결합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있어라.” 
 
기도하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사람이 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들에게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신다고 하십니다. 
이 각자에게 할 일은 각자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하되 꼭 필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고 하면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됩니다. 
 
어떤 동물 농장 주인이 있었습니다. 
캥거루를 잡아 와 1m 높이로 울타리를 치고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캥거루가 밖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번엔 2m로 울타리 높이를 올렸습니다. 
그런데도 다음 날 캥거루는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주인은 3m로 높였습니다. 
그래도 캥거루가 나와 있었습니다.  
 
농장 주인은 캥거루를 자신이 키울 수 없음을 알고 놓아주었습니다. 
캥거루는 유유히 숲속 친구들에게 갔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캥거루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너 높이 뛰기를 정말 잘하는구나!”
“아냐, 그 농장 주인이 울타리를 치고는 문을 계속 잠그지 않았어!” 
 
우리는 일의 목적을 명확히 알고 내가 하는 일이 헛수고나 낭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정확한 목적을 모르면 이 어리석은 농장 주인처럼 고생만 하고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일의 명확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자아실현 등의 고상한 목적을 댈 수도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일의 원초적인 목적은 ‘생존’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생존하기 위해 일을 합니다. 
일하지 않고 생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가끔은 일도 안 하고 생존하려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무엇의 생존을 위해서 일하느냐입니다. 
그저 육체를 생존시키는 것이 일의 목적이라면 나중에 큰일 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생존을 동시에 신경 써야 하는 존재입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생각이 납니다. 
노인은 커다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고 그 물고기와 사투를 벌입니다.
결국은 그 물고기를 잡았지만, 너무 커서 배에 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 옆에 매어두고 돌아오는데 결국 상어 떼에게 다 뜯어먹히고 맙니다. 
 
이는 사람이 육체적인 생존에만 치중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쓰고 헤밍웨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엽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명성, 가족, 자녀들, 재산 등은 자신의 배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육체의 배는 채워주었지만, 영혼의 배는 채울 수 없었습니다. 
영혼은 마치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와 같았습니다.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 일해야 하지만, 영혼의 생존도 신경 써야 합니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영혼도 양식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떠한 것도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영혼의 양식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이니까, 사람이 미워지고 우울해지고 걱정과 근심이 많아지고 초조해지고 두려움이 많아진다면 이것이 배가 고프다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를 무시하고 일하지 않으면 육체의 배를 불리는 것은 아무 소용없게 됩니다. 
어차피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 묶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육체보다도 영혼의 생존입니다. 
영혼이 살아있으면 육체는 부활할 수 있지만, 영혼이 죽으면 다 죽는 것입니다. 
 
복역 기간이 6개월 남은 죄수가 있었습니다. 
지루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창틀 사이로 사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습니다.  
 
사마귀는 죄수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춤을 추라고 했더니 춤까지 잘 추는 것이었습니다.
죄수는 사마귀를 잘 훈련하면 밖에 나가서 큰돈을 벌 수 있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훈련을 잘 시켰고 드디어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가자마자 배가 고파서 맛있는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돈은 없었지만, 음식을 먹고 주인에게 사마귀 춤을 보여주면 음식값을 받지 않으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맛있게 음식을 잘 먹고 가방에서 사마귀를 꺼내 탁자에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사장을 불러 사마귀를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깜짝 놀란 사장은 손바닥으로 사마귀를 내리친 다음 연신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배만 불리다가는 상황파악이 안 되고 더 중요한 영혼을 잃게 됩니다. 
육체를 지나치게 신경 쓰면 영혼은 배를 곯게 됩니다. 
더 중요한 영혼의 생존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영과 육은 반대입니다. 
사람은 육체만 배부르면 영혼도 배부른 줄 압니다. 
그러나 그 반대라는 것을 잊습니다. 
 
그래서 감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 안에서 판단이나 미운 마음, 불안과 초조, 걱정과 두려움의 마음이 일 때는 분명 영혼이 배고픈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영혼의 양식을 주러 오시는 예수님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려면 영과 육은 반대이고 영혼의 양식을 채우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상태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은 영혼의 양식을 주러 오시는 예수님을 이번 성탄 때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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