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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11-23 조회수 : 1167

11월23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21,1-4 
 
죽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믿음이란?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풍족한 가운데 얼마씩 넣었지만,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도 생활비를 다 넣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은 봉헌의 참다운 의미와 목적을 알려주려 하시기 위함입니다.
봉헌은 돈을 내는 것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과부는 봉헌함으로써 생활이 불편해졌고 부자들은 봉헌을 많이 해도 불편해지지 않습니다.
삶이 불편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포기하고 죽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 전에는 과부들을 등쳐먹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율법학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그들보다 과부가 더 영성이 높다는 것을 봉헌을 통해 말씀해주십니다.  
 
그다음은 성전 파괴의 예언이 나오는데 결국 봉헌을 통해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전처럼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듯이 봉헌은 풍족한 데서 일부를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합니다. 불편해져야 봉헌입니다. 
 
그렇다면 왜 봉헌을 통해 자신을 죽여가야 할까요?
그 이유는 구원은 분명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자신을 포기하고 죽이고 봉헌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말을 임금의 것으로 내어주었는데 임금을 말 위에 태우고는 고삐를 주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임금은 자기 마음대로 널뛰는 말 위에서 그 말을 조종하지 못하고 떨어지고 맙니다.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믿어봐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신 안에 들어오시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죽어야 변합니다. 
 
프랑스에서 실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써머스비’(1993)입니다.
남북 전쟁에 나간 ‘잭 써머스비’가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자 고향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 친구와 친척들은 그의 죽음을 별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포도 농장의 주인이었던 써머스비는 거칠고 잔인한 데다 농사와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말썽만 피우던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자의 몸으로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집안일에다 농장일까지 맡아 고생하던 아내 로렐은 그 지긋지긋한 남자가 사라져 해방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는 남자 오린 미첨은 써머스비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로렐을 도와주며 써머스비의 죽음이 공식화되면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지 7년 만에 써머스비가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써머스비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니 이전의 모습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아내를 따듯하게 대해줬고 흑인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농장에다 함께 담배 농사를 짓자고 제안합니다.  
 
담배 농사를 지으며 번 돈의 일부를 매년 내고 그 지급한 값이 땅값을 넘어서면 그 땅은 농사를 지은 사람들 소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에게 이만큼 큰 혜택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계약서에 사인합니다.
처음엔 써머스비를 무서워하던 아내 로렐도 써머스비를 받아들이고 아기를 낳습니다. 
 
모든 게 잘 되어갈 무렵 써머스비가 살인죄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오직 로렐만이 지금의 남편이 써머스비가 아님을 압니다.
사실 이 마을을 찾아온 써머스비는 감옥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던 진짜 써머스비가 죽고 난 후 그 사람이 살던 곳으로 와봤던 것입니다.  
 
지금의 써머스비는 호레이스란 사기꾼입니다.
그러나 로렐과 마을 사람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만약 자신이 써머스비가 아니라면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누리는 혜택이 사라지고 맙니다.
계약이 무효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써머스비가 가짜라고 주장하며 그의 목숨을 살리려고 하지만 써머스비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진짜 써머스비라며 사형을 받아들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땅을 나누어 가지게 되고 써머스비는 사형을 당합니다. 
 
끝까지 자신이 아닌 써머스비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이 모습은 마치 야곱이 자신은 끝까지 에사우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가 살면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써머스비가 되려면 호레이스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호레이스는 죽습니다.
두 정체성이 양립할 수 없습니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이유는 그 정체성을 흔드는 것에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동물들에 고삐를 매는 것입니다. 
 
이전의 자신의 정체성을 죽이려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 얻은 정체성이 죽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이를 위해 시작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봉헌은 이전의 자신을 죽이는 시작입니다.
그렇기에 봉헌을 하며 이전의 자기가 힘들지 않다면 그것은 새로운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과부는 자신의 주님을 위해 더 많이 비워낸 사람이고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위선적인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고삐를 주지 않으면서 주인을 섬기겠다고 말하는 짐승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정체성을 그리스도로 정하는 것 이전에 자신은 죽었다는 고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던가,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는 고백, 혹은 자신이 죽었다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기도로 “저는 사랑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 앞에 “저는 죽었습니다”를 덧붙이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죽지 않으며 믿겠다는 말은 고삐를 주지 않으며 자신을 타라는 것과 같은 위선임을 잊지 맙시다.
자기 봉헌은 자신을 죽여 새로운 정체성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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