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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1-22 조회수 : 1164

중요한 건 ‘자기 정체성’지 바보야!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고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왜 교회에서 마지막 주일에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낼까요?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면 우리는 무엇일까요? 
그분의 백성이나 신하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니 우리는 그분의 나라가 됩니다.  
 
이렇게 생기는 정체성이 나를 만들고, 그 나를 만든 정체성에 당연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심판을 이기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심판관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때 양과 염소로 나뉘어 있습니다. 양과 염소는 본성의 차이를 말합니다. 
태어날 때 본성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자기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내가 늑대라 믿으면 늑대의 정체성에 당연하게 살 것이고,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으로서 당연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워낙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심판 기준대로 
‘가장 작은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작은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나의 정체성에 있다는 것을 
내용이 막장인 한 영화를 통해 보고자 합니다. 
‘경축! 우리사랑’(2007)입니다. 
 
이야기는 노래방을 함께 운영하는 한 하숙집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봉순씨는 쉰이 된 가정을 책임지는 여자입니다. 
남편은 노는 것만 좋아하고 심지어 외도까지 합니다. 
딸도 집에서 놀기만 하며 하숙하고 있는 남자와 사귑니다. 
무작정 결혼만 하겠다던 딸은 취직이 되어 결혼자금을 벌어오겠다면 집을 나가버립니다. 
다 자기 멋대로입니다. 
 
졸지에 헤어지게 된 하숙집 남자 구상은 술에 찌들어갑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봉순씨는 술 취해 쓰러져있는 구상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의 아기를 임신하게 됩니다. 
남편도 외도 중이라 뭐라 하지 못하고 빨리 딸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봉순씨의 사랑은 진심입니다. 
구상도 봉순씨의 딸보다는 봉순씨를 더 좋아하게 됩니다.  
 
봉순씨는 결국 딸의 애인이었던 구상의 아기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족 중 아무도 자신을 아내나 엄마 취급해 주지 않았기에, 지금 엄마, 아내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도 봉순씨를 뭐라 하지 못합니다. 
물론 구상에게 계속 마음이 있는 딸이 엄마에게 울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엄마가 뭐 이래? 엄마가 뭐 이래!”
이때 봉순은 잠깐 흔들립니다. 
그러나 아내이고 엄마이기를 다시 포기하고 구상의 애인이기를 선택합니다. 
 
말도 안 되는 스토리지만 지금까지 남편이 남편답지 않게, 자식이 자식답지 않게 살던 그 가정에서 봉순씨도 아내이고 엄마이기를 포기하고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는 모습이 전혀 공감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가 나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강론에서 씨돌, 요한, 용현으로 산 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의 삶은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 이유를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적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 살아온 것입니다. 
그것뿐인데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나의 정체성이 아닌 행동만을 바꾸려 하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됩니다. 
행위만 바꾸려 하면 본성은 안 그러면서 그런 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와 한 몸이 되심으로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정체성이 우리 본성을 염소에서 양으로 바꾸고 결국 양으로써 당연한 삶을 살게 해줍니다. 
 
김신조씨도 삶과 죽음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과 북한을 위해 죽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사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나!’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라던가,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던가, 
나는 하느님의 본성을 입었으니 나도 사랑이라던가의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본성이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연하게 살게 만들고 마지막 날 심판 때 양으로 분류됩니다.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차 위에서 발이 끼어 있는 사람을 구급차에 신고만 하고 저는 저 갈 길을 간 적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가족이었다면 그렇게 바로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혹은 ‘나는 사제다!’라는 생각만 했어도 행동이 달랐을 것입니다.  
 
나의 행동은 나의 정체성에 지배당합니다. 
결국, 나와 나의 자녀를 어떻게 성장시키고 싶으냐는 어떤 자기 정체성을 넣어주고 싶으냐는 것에서 
결정됩니다.  
 
물론 그 정체성은 진리와 은총, 즉 나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새겨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나에게 왕이 되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나의 정체성이 그리스도가 되게 한다면 그것으로 그리스도는 나의 왕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왕으로 여기는 정체성으로 산 사람만이 마지막 심판 때에 양으로 인정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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