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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1-21 조회수 : 1169

누군가를 내 뜻 안에 머물게 하려면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께서 3살 때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성전에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동정녀들을 성전에서 키우며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것을 준비하던 관습에서 비롯됩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을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제물로 성전에 봉헌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의 집에 살려면 그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집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 형제요, 누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같은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같은 부모님의 같은 뜻을 따르기 때문에 같은 집에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려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집에 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면 이제 그분이 내 안에 사시게 됩니다. 
하느님이 성모님의 집에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예수님은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내가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분 집에 살기로 결심하면 그분이 내 집에 사십니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뜻은 성령님이 됩니다. 
 
이 원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를 나의 뜻 안에 머물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먼저 그 사람의 뜻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도 내 뜻 안으로 들어옵니다.  
 
‘일반적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가리옷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는 말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50년째 돌 속에 사는 할아버지〉 사연이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싸우는 부모 밑에서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유일하게 그 할아버지를 아껴 주었던 분이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는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산 깊은 곳에서 무려 50년을 돌 틈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바로 밑이 고향이었지만 할아버지는 동물 사료를 훔치러 내려가는 것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 제작팀이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을 때 할아버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상황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좀처럼 세상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옛 친구분들을 불러서 설득해보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도망쳤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걱정이었습니다. 
 
이때 이 프로그램 제작진이 항상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사는 움막 옆에 텐트를 치고 무작정 같이 지내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먼저 내려오라는 말보다 당신과 함께 살아줄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열흘 정도 있다가 보면 숨어 사시는 분들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열흘 동안 할아버지가 먹고 마시고 일하시는 것을 함께 하다 보니 할아버지도 제작진의 설득을 받아들여 검사를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드시는 것을 함께 먹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쓰레기를 뒤지며 산에 숨어 사시는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함께 머무르며 사는데, 그때는 할머니가 남이 버린 음식으로 만든 것을 함께 먹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그 할머니도 병원 치료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뜻을 강요하기 이전에 먼저 상대의 뜻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거처에 함께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뜻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모님께서 항상 주님의 뜻 안에 머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가족이나 이웃들을 주님께 데려와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뜻을 비치는 것보다 그들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린 후 나의 뜻을 따라줄 수 있도록 호감을 얻어야 합니다.  
 
남이 나의 말을 안 들어준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나도 남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이나 이웃들에게 나의 뜻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의 집에, 혹은 그들의 뜻에 나 자신을 봉헌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것은 매우 어렵고,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그 모든 사람들의 뜻에 따라주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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