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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11-19 조회수 : 1075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9,41-44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눈, ‘나는 누구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서기 70년 로마 군인들에게 짓밟히게 될 예루살렘 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이유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만약 그 눈이 있다면 이 질문에 올바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1968년 북한 특수부대 124군 소속 31명 특공대원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산속에서 마주쳤다가 살려준 지게꾼 형제들의 신고로 서울은 이미 경계태세에 있었습니다.
결국,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김신조를 제외한 모든 대원이 전투 중 사살되었습니다. 
 
바위틈에 숨어있던 김신조도 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합니다.
이미 주위는 포위되어 살 가망성이 없었고,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이 들려옵니다.
문득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집니다. 
 
‘나는 김일성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존재인가?’ 
 
그는 항복합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북한은 자신들을 보낸 적이 없다고 잡아뗍니다.
분노를 느끼고 항복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과 같은데, 이 세상에서는 믿을 수 있는 존재를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을 때는 사춘기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요?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계시니 부모가 나를 규정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니 나의 근원은 육체적인 부모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부모는 나에게 눈이나 생명을 다시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다시 줄 수 없다면 이전에도 준 적이 없는 것입니다.
더 근원적인 나의 원천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 해답을 완전히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의류 광고에 나오는 문구를 답으로 여겼습니다.
“나는 나야!” 
 
그러나 이 말은 오직 창조주만 하실 수 있는 말임을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우리가 “나는 나다”라고 하면 나는 여전히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엄청난 폭포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 폭포로 떨어져서 죽는지, 사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떨어지기 전부터 불안합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면 자신을 인간이라 믿으면 안 됩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불안할 수밖에 없고 그 불안을 인간적으로만 극복하려 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채, 2년째 쓰레기 더미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인」이란 제목으로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방영된 내용이 유튜브에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2년 동안 온종일 쓰레기를 뒤지며 본인이 쓸만하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을 집에 쌓아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방송국 기자는 그 ‘좋은’ 물건들 구경시켜 줄 수 있느냐고 해서 집에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잠을 잘 틈도 없고 화장실에까지 물건을 쌓아놓아 본인은 공중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불안하니까 모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생긴 것이고 치매까지 겹쳐서 그렇게 되었다고 의사는 말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모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인이 죽어도 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분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해답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려 하신 유일한 믿음은 우리도 죽었다가 부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나 자신에게 물을 때,
‘나는 나다’라거나, 죽으면 살 수 없는 피조물을 의미하는 대답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무너지고 맙니다.
그리고 살아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물으십시오.
참으로 좋으신 창조자의 종이라거나, 그분의 자녀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피조물의 삶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창조자가 됩니다.
그러면 창조자가 누리는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확신이 나에게 평화를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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