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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11-13 조회수 : 990

11월13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7,26-37 
 
살아있는 ‘시체’가 안 되려면 
 

 
오늘 복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심판, 혹은 죽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나 세상의 심판을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고 칭하십니다.
아마 당신께서 ‘심판관’으로 우리 각자 앞에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어디에서 일어날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여기서 ‘시체’는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시체의 삶과 생명의 삶과의 차이점을 알고 결코 시체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체에게 독수리가 언제 내려와도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죽음 앞에서 시체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고 당황스러워할 것입니다. 
 
1977년 4월 20일 대낮에 쇠망치로 장정 4명을 죽인 사건이 광주 무등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살인자는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던 ‘박흥숙’이었습니다.
박흥숙은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형도 안타까운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박흥숙은 중학교 수석 입학을 했지만, 외할머니,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둘을 책임져야 했던 작은 가장으로서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흥숙은 무등산 중턱에 작은 움막을 짓고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구청 철거 일용직 7명이 들이닥쳐 집을 부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까지 지르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다시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흥숙은 당시 23세였고 고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한 상태였습니다.
오갈 데 없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제발 불만은 지르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을 짓지 말고 땅속으로 들어가 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을 질렀고 3년 동안 가정부를 하며 모아둔 어머니의 돈 30만 원까지 타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실신하였고 여동생은 반항했습니다.  
 
박흥숙은 저들도 자신들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며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로하였습니다. 
 
박흥숙은 아프신 할머니들이 사시는 다른 움막들엔 불을 지르지 말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차 없이 모든 움막에 불을 질렀습니다.
가난한 이웃이었던 노인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육박전으로 그들을 막았습니다.
박흥숙은 철거반원들보고 노인들에게 사과하라고 했습니다.
철거반원들은 “법대로 하는데 사과는 무슨 사과야!”라며 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박흥숙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들이 들고 온 쇠망치로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철거를 지시했던 정부는 불을 지르도록 지시한 사실을 일절 밝히지 않게 하고 박흥숙을 남의 돈을 빼앗아 광주에 집을 세 채나 소유한 깡패로 묘사하도록 언론을 조작하였습니다.
박흥숙은 자신에게 피해를 본 이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잠잘 곳이 없어서 남의 집 화장실이나 처마 밑을 찾아본 사람만이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할 것이라 말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참조: ‘망치로 성인 4명을 때려 눕힌 무등산 타잔 박흥숙’, SBS NOW; 꼬꼬무 7화] 
 
사실 그날 사망한 철거반원들도 박흥숙도 모두 시대의 피해자라 할 수 있습니다.
철거 반원들도 살기 위해 한 행위였습니다.
처음 박흥숙은 박해받는 사람으로서 죽어 있었으나 자신이 살아나서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죽어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나면 ‘시체’가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시체가 되면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 눈에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고,
세상에서 산 사람은 하느님 눈에는 시체입니다.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것 자체가 세상에서 죽는 유일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이 갑자기 다가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체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구약의 두 사례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의 홍수’이고 하나는 ‘소돔의 멸망’입니다. 
 
노아는 홍수 때 홍수가 나자 노아는 침착했고 다른 이들은 당황했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침착할 수 있었을까요? 이미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언젠가 닥칠 것으로 예상하여 세상에서 죽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홍수가 들이닥칠 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또 하나는 소돔의 멸망 때입니다.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은 두 천사의 도움으로 소돔이 곧 멸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돔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 위에 유황불이 불타고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 것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세상 것을 섬기는 사람이 시체입니다.  
 
시체에겐 심판이 도둑처럼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절대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체에게 독수리라는 죽음이 갑자기 내려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세상에서 죽읍시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라고 말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죽음으로 보이나 우리에겐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하루에도 “나는 죽었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해보십시오.
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비로소 시체의 삶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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