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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11-11 조회수 : 1058

11월11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7,11-19 
 
봉사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 
 
오늘 복음의 주제도 역시 ‘믿음’입니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청에 종이 주인이 시킨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고 하신
비유에 이어지는 또 다른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분명 주님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주님을 받아들였다면 주님의 부르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새로운 소명이 생깁니다. 
 
제가 대학생 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5년 동안 읽으며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동시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 사제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따르고 싶어집니다.
문제는 그 소명을 따르면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부르심을 따르면서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10명을 치유해 주십니다.
어쩌면 이것이 주님을 받아들이기 이전과 이후의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여 새로운 소명의 길로 나아가면 그 이전의 상태는 마치 나병이 걸렸을 때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소명으로 받는 성령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소명도 주시지만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도 주십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고 치유해 줄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불러주시고 치유해 주신 것에 감사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불러주신 것에 감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직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유튜브 채널 ‘감동 실화 영상’에 ‘어린 강아지는 자신을 구조해준 남성을 만나자...’ 란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캐나다에 사는 와그너씨는 심한 피부병에 걸린 유기견을 근처 병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는 와그너씨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아 목숨엔 지장이 없었지만 아무도 심한 피부병을 앓는 그 녀석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조’란 이름을 지어준 그 녀석이 어떻게 되었는지 와그너씨가 동물 병원에 전화했지만, 모조는 여전히 동물 병원에 있었습니다.
와그너씨가 모조를 키우기로 하고 병원에 다다르자 피부병으로 털이 하나도 없는 모조는 와그너씨에게 달려들어 마구 반가운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와그너씨로부터 키워진 모조는 이제 털도 자라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모조는 길거리에서 지내던 삶에서 와그너씨 집에서 살기 위한 규칙을 준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규칙을 강요한다고 와그너씨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분명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은 이와 같은 것을 느낍니다.
나병이 치유 받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봉사하면서도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유튜브 채널 ‘애니멀봐’에선 4년 동안 계속 자신의 집이 있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백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래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집은 재개발로 지정돼 허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백구는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는데도 4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것을 안 동네 아주머니가 2년 동안 백구에게 먹을 것을 놓아주었습니다.
백구에게 지금 가장 행복한 일은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무엇을 해야 좋은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삶의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의미를 일단 맛보았다면 다른 삶은 다시 나병이 걸리는 삶과 같습니다.  
 
사람이 개 한 마리를 불러준 행복이 이 정도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행복은 얼마나 더 클까요? 
 
본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억지로 시켜서 자신도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봉사하면서 받는 주님의 성령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을 받았다면 봉사하기 이전의 삶은 나병에 걸렸던 삶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봉사하며 감사하지 못한다면 아직 영적인 나병 상태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봉사한다면 감사하고 주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성령의 보답은 그 봉사를 통해 겪는 모든 고통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을 더 완고한 파라오로부터 빼내는 작업은 엄청 힘에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세에게 성령으로 상징되는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자신이 이전에는 절대 할 수 없었던 능력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볼 때, 도망치기 급급했던 40년 전의 자신의 모습은 나병이 걸렸던 것과 같이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봉사하기 이전의 삶이 그립다면 그건 절대 주님께서 불러주신 봉사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응답했다면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상태가 마치 나병의 상태와 같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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