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0일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 17,7-10
봉사에 대한 보상은 하느님 자신
오늘 복음 말씀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사도들의 청에 예수님께서 해 주신 비유입니다.
어떤 종이 밭에서 일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또 저녁을 준비하고 자신이 식사하는 동안 시중을 들라고 말합니다.
이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당신을 따라다니며 어떠한 보상을 바라는 믿음이 부족한 사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라고 하시며 이런 믿음을 가졌던 분이 성모 마리아이심을 암시하십니다.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여 마라라는 쓴 물이 나오는 샘에 나무 하나를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쓴 물이 단물이 되어 사람들이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징의 체계상 모세가 쓴 물에 던진 나무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돌무화과나무라 볼 수 있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먹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관을 만드는 나무였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인간이 개미가 된다면 그것이 죽음과 다를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는 것도 하나의 죽음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쓴 물의 본성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많은 이들을 살리는 단물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가 돌무화과나무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잉태하심에 대해 다른 보상을 청해야 할까요?
물론 천상모후의 관을 쓰시기는 하지만 당신 태중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또 그 아드님을 길러내신 것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리스도를 잉태하심으로써 당해야 했던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하시며, 주님의 종이 된 것만으로도 만족하여 ‘마니피캇’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성모 마리아의 모범이 곧 믿음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 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보상을 청한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소명을 따름이 곧 행복인 이유는 하느님은 ‘당신의 소명’과 ‘당신 자신’을 동시에 주십니다.
존재가 곧 뜻입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소명을 입으면 하느님을 입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가지는 것만큼 큰 보상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일도 시키시지만, 당신께서 함께하시기 위해 성령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주시는 열매가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겪어야 하는 작은 고난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얻게 되는 그 큰 행복을 잃기도 합니다.
금실이 아주 좋은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몹시 가난했던 젊은 시절 그들의 식사는 늘 한 조각의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사랑과 이해로 극복한 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결혼 50주년에 금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부부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 부부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마주 앉았습니다.
온종일 손님을 맞이하느라 지쳐있었으므로 그들은 간단하게 구운 빵 한 조각에 잼을 발라 나누어 먹기로 했습니다.
“빵 한 조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으니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나는구려.”
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지난 50년 동안 늘 그래왔듯이 할머니에게 노릇노릇하고 고소한 빵의 껍질을 잘라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할머니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몹시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역시 당신은 오늘 같은 날에도 부드러운 빵 속은 당신이 먹고 내게는 딱딱한 빵 껍질을 주는군요.
50년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난 날마다 당신이 내미는 빵 껍질을 먹어 왔어요.
그동안 당신에게 늘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섭섭한 마음을 애써 참아왔는데, 하지만 오늘같이 특별한 날에도 당신이 이럴 줄은 몰랐어요.
당신은 내 기분이 어떨지 조금도 헤아릴 줄 모르는군요.”
할머니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할아버지는 몹시 놀란 듯 한동안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할머니가 울음을 그친 뒤에야 할아버지는 더듬더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후유! 난, 부인을 위한 일심밖에는 없었소.
당신이 진작 이야기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난 몰랐소.
하지만 여보, 바삭바삭한 빵 껍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소!”
할아버지는 50년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할머니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봉사하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면 나에게 안 좋은 것만을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봉사는 믿음이 없는 봉사입니다.
봉사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발견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무신론자가 한 봉쇄수도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장상에게 비꼬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생 수도원에 갇혀 일과 기도만 하다 죽었는데 하느님이 없으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수도원 원장이 말했습니다.
“누구도 강요해서 봉쇄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들은 기도하고 일하는 가운데 이미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복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하느님이 없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느님이 계신다면 진짜 놀라게 될 사람은 당신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다른 보상을 바랄 것 없이 그 뜻을 따름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께서 함께 계셔서 하느님이 그 사람의 보상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종은 일하면서도 주인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하고 감사해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봉사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만약 다른 보상을 바라고 있다면 믿음이 없는 헛된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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