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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11-09 조회수 : 917

11월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복음: 요한 2,13-22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넘어 
 

 
오늘은 베드로 대성전이 신축되기 전까지 교황의 거처였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성전에 들어가면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되었던 식탁이 대표적인 유물로 남아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한 식탁은 그 위에서 성찬례가 제정된 숭고한 유물입니다. 
 
저는 그 유물을 보며 생각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성찬례가 교회의 중심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모습을 묵상하곤 합니다.  
 
교회의 성찬례는 바로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 잔치를 상징합니다.
한 아버지를 둔 교회 가족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식탁 주위에 진정 ‘가족’으로 모여야 합니다.
분명 성당도 그런 분위기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가족이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꼭 성공해야만, 혹은 성공을 위해서만 가야 하는 곳이라면 참 가족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사업자금을 챙기기 위해, 혹은 다른 형제들보다 성공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찾아가야 하는 곳이라면 그런 가족은 가족의 참 의미를 잃은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거대한 라테라노 대성전을 보면 그 거대함 속에 약간은 성만찬 식탁의 의미가 묻혀버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성당이 너무 크고 화려해서 전통시장처럼 편안한 것이 아니라 백화점처럼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백화점이 크고 화려한 이유는 그 크고 화려함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지 느끼게 만들어서 새 옷을 사게 만들고 새 구두를 신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성당이 백화점과 같아서 그곳에 온 가난한 사람들이 주눅 들게 된다면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채찍을 들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저도 본당신부를 할 때, 어떤 분의 “신부님은 돈 있는 사람들과만 어울리세요!” 라는 충고의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따로 돈 있는 사람들을 만나려 한 적은 없었지만 사실 사목회나 본당에서 굵직한 여러 봉사를 하시는 분들은 비교적 넉넉한 분들이었기에 가난한 분에겐 그렇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교회 시스템 자체가 가난한 이들은 바빠서 봉사할 수 없는 처지이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봉사하며 사제와 어울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성전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연극 ‘금관의 예수’에서 거지는 신자들이 성탄 미사를 마치고 갈 때까지 밖에서 떨고 있어야 했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이들은 자녀들 대학 걱정, 새로운 사업에 대한 걱정들을 아기 예수님께 쏟아붓고 갔습니다.
내년에 잘 되게 해 주면 비단 이불과 금관을 씌워주겠다고 아기 예수님께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거지는 그들 틈에 끼일 수 없었습니다.  
 
부자들이 자녀들에게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손가락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 돌아가고 아기 예수님께 자기 누더기를 벗어 덮어준 사람은 바로 그 거지였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 사람은 거지 한 명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시하는 교회를 말한다면 부자들로서는 역차별이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교회에 부자들도 부담 없이 올 수는 있지만, 부자인 교회에 가난한 이들이 편안하게 올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난한 지역보다도 부자 동네에 가톨릭 신자 비율이 높다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한 이들도 부담 없이 성당에 나와 주님을 찬미하게 할 수 있을까요?
백화점의 모습이 아니라 전통시장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게 로마로 들어오는 돈 수레들을 보며 “‘이제 나는 은도 금도 없소!’라고 말하던 시대는 지났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도 “맞습니다. ‘자 일어나 가시오!’라고 말하던 시대도 지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라테라노 성전의 최후의 만찬 식탁은 황금 장식품으로 거의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으로 화려하다!”라는 감탄이 나오는 성전이 아니라
‘내가 꾸미고 싶다!’라는 마음이 드는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지라도 자기 누더기를 덮어드리고 싶은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 아기 예수님과 같은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지도 부담 없이 성전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 유튜브에 「자신을 끔찍이 학대한 주인을 법정에서 다시 만난 반려견」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행인이 쓰레기통 안에서 개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여행 가방 안에 넣어져 버려진 개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주인은 동물 학대죄로 7년이나 이어지는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개가 죽었는지 알고 가방에 넣어 버렸다고 말했지만 실상 학대를 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재판관은 그럼 마지막으로 개를 만나보게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7년 만에 주인을 만난 개는 멋쩍어하는 주인과는 다르게 바로 달려가 꼬리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자신을 가방에 넣어 버릴 때부터 개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그전에는 개의 그런 반응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반응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난한 이가 필요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한겨울 마구간에서 벌거벗고 추위에 떨고 계셨습니다.
어른이 된 예수님은 세상에서 박해받고 옷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헛간이라도 있다면 좀 쉬고 가시라고 내어드리고 싶고,
수건 한 장이라도 있으면 그분의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게 만드는 삶을 사셨습니다.  
 
교회가 이런 모습을 되찾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며 참 성전의 모범이 십자가에 매달린 당신 모습이어야 함을 깨우쳐주려 하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나 성당이 온전한 성전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십자가의 예수님 모습을 닮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대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짓는 성당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가난함으로 지어진 성전이라면 가난한 사람들도 부담 없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성당이 되려면 가난한 이들보다 더 가난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넘어 가난한 이들이 필요한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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