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3,31-35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는 이유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에게 생명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려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평안하십니다.
그 이유가 당신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때문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하느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하느님 백성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뜻에 지배받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 안에 머물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이기실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당신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당신 모든 것도 내어주십니다.
예전에 공원 원두막에서 친구들과 싸 온 도시락을 함께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개 한 마리를 줄로 끌면서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내려오는 남자 청년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개의 목줄이 자전거 바퀴에 걸리며 작은 개는 바퀴를 따라 한 바퀴 빠르게 돌더니 깽 하는 소리와 함께 아스팔트 위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개는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청년은 저희가 지켜보는 것을 알면서도 피 흘리는 개를 흔들며 오열하였습니다.
저는 ‘저 사람이 부모가 죽어도 저렇게 오열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작은 개 한 마리가 무엇이길래 한 청년을 오열하게 했을까?’라는 생각으로 넘어갔습니다.
왜 그 청년은 자신이 낳지도 않은 개를 그렇게 사랑하게 된 것일까요?
청년은 개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기세였습니다.
동물들은 자기 새끼를 사랑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같은 모양으로 생겼어도 자신의 새끼를 더 사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기적 유전자』를 쓴 사람과 같은 진화론자들은 그 이유가 자신의 새끼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유전자를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해 부모가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유전자 복제를 하여 나와 똑같은 인간을 만 명 정도 만들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영화에서도 나오고 가까운 미래에 이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와 똑같이 생기고 나와 똑같은 유전자를 지녔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바보가 될 수 있을까요?
영화 ‘그램린’(1984)은 기즈모라고 하는 작고 예쁜 동물이 12시가 넘어 음식을 먹으면 생겨나는 것으로 어쩌면 자식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썽을 부리자 기즈모는 자신에게서 나온 것들이지만 그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합니다.
만약 나의 자녀가 히틀러나 빈 라덴이 되어 세상에 악행을 저지른다면, 그리고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라면 자식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들을 두둔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복제되어 단순히 나의 DNA를 가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 DNA를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 자식이 악함을 알면서도 그 자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주장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인간이 후대에 전달하는 것은 자신의 유전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뜻’입니다.
모든 동물은 자기 뜻을 따라주는 것을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동물은 생존본능 이외의 뜻은 모두 부모를 통해 부여받습니다.
어떤 아기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인도에서 자란 아기가 스스로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기는 어떤 동물이건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의 뜻을 물려받고 그런 모습으로 자라게 됩니다.
부모도 아기가 자기 ‘뜻’을 따라줄 것을 압니다.
자기도 그렇게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예쁜 것입니다.
한 사람이 개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면 그 개는 분명 그 주인의 뜻을 어떤 개보다도 잘 따라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받는 방법은 그 대상의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뜻을 따라주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 안에서 자신의 뜻이 담겨있는 것을 보며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뜻이 길이 보존되게 하려고 자녀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보호합니다.
자기 뜻을 따라주는 대상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사랑은 내어주게 만드는 힘입니다.
만약 위의 청년이 자신의 뜻을 따라준 개를 위해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할 수 있었다면 하느님은 당신 뜻을 따라주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당신 영원한 생명까지 내어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선착장 옆을 지나가던 빨간 자동차 한 대가 가드레일을 받고 바닷물 속으로 빠졌습니다.
주변 시민들은 물속으로 뛰어내려 먼저 할머니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자 할아버지는 물이 반쯤 차오르는데도 자신의 반려견을 먼저 구해달라고 창문 틈으로 내밀었습니다.
다행히 할아버지도 구조될 수 있었지만, 이는 자신의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선택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 개가 할아버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할 정도로 소중하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DNA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뜻을 따라주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해야 그 대상의 뜻을 따라줄 수 있습니다.
사랑과 뜻을 따름은 하나입니다.
내가 어떤 대상의 뜻을 따라주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보상이 달라집니다.
늑대의 뜻을 따라주면 늑대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늑대가 주는 보상입니다.
사람의 뜻을 따라주면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뜻을 따라주면 하느님 자녀의 모든 지위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죽음 앞에서도 마음이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던지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당당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당신이 따라주는 뜻을 주시는 분께서 모든 생명의 주인이심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신의 뜻을 따라야 신이 줄 보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개가 주인의 뜻을 따라주면서 먹을 걱정, 잘 걱정을 하지 않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본성적으로 하느님께서 가진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분은 당신의 뜻을 따라주는 이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보상으로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서 물 위를 걸을 마음이 생겨날 수 없지만, 하느님은 그런 뜻을 강요하십니다.
아드님을 보내시어 당신 뜻은 아드님이 그러신 것처럼
우리 목숨을 바쳐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뜻을 알려주시기 위해 모범을 보이고 계십니다.
이것이 이 앞 내용에 나오는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야 하는 이유는 그 좁은 문인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그 뜻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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