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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10-27 조회수 : 680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 13,18-21 
 
하느님 나라로의 진화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으로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서 겨자씨를 자기 정원에 뿌리면 그것이 자라나 나무가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사람 안에 자라나면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새들이 깃들이게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수녀원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한 노숙인의 “목마르다”라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녀는 곧 모든 가난한 이들이 예수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후로 그 수녀님은 더는 가난한 이들을 자기 품 안에 모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녀는 꿈에서 베드로를 만나 “제가 하늘 나라를 가난한 사람으로 꽉 차게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또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합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습니다.
누룩은 떡이 될 것을 빵이 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밀가루에 누룩이 들어갔는데 떡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떡을 먹다가 목이 막혀 사망한 사례를 여러 번 봅니다.
떡도 좋은 것이지만 빵은 치아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도 양식이 될 수 있는 더 좋은 것입니다.  
 
새들이 깃들이게 하는 겨자씨는 누구에게나 ‘휴식’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뜻한다면, 누룩의 비유는 ‘양식’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사로 잘 살아보겠다던 이태석 신부는 마음속에 ‘가장 가난한 곳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의사 생활을 접고 수도원에 들어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의술과 양식을 그들에게 베풀었습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누룩이 섞인 빵처럼 그들에게 부드러운 빵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암에 걸린 것을 알고도 그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이룩되면 이렇게 양식이 되고 휴식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바뀌는 것은 그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처럼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영화 ‘샤인’(1996)은 연주회에서 악마나 연주할 수 있다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연주한 뒤 혼절하여 정신병자가 되어야 했던 한 실존 인물 ‘데이빗 헬프갓’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브루스 립턴’의 『당신의 주인은 DNA가 아니다』의 이야기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브루스 립턴은 의대에서 세포에 관한 것을 가르치던 교수였습니다.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 과학계에서 믿어오던 것은 인간의 유전자가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이 걸릴 유전자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으면 그 병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유전자는 그저 지금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후대에 전달하는 생식기와 같은 역할이지 두뇌처럼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만드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받아들여진 ‘믿음’입니다. 
 
그가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시골에서 교수로 있을 때였습니다.
오토바이 사고로 힘겹게 몸을 움직여야 할 때 자신의 제자 중 카이로프랙틱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팔을 올리게 한 다음 “나는 브루스입니다”라고 말하고 힘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 팔을 제자가 끌어내리려고 해도 잘 안 되었습니다.
그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이게 뭐 하는 짓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제자는 “이번엔 ‘나는 메리입니다’”라고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작은 힘에도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는 혼절할 것처럼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유전자가 외부의 믿음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브루스인 것을 속이며 자신이 메리라고 말할 때는 DNA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자신 안에서 충돌할 때 세포로부터 당연히 나와야 하는 힘도 꺾일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람은 분명 유전자로도, 노력으로도 지배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지배됩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바꿔주러 오신 분입니다.
믿음이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다시 영화 ‘샤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데이빗 헬프갓의 아버지는 호주에 살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유태인입니다.
당시 독일에서의 유태인 학살 직후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데이빗이 외국으로 나가 실력을 더 쌓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직 데이빗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신의 노력으로만 이루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실력으로는 데이빗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라흐마니노프를 칠 수 있다고 말해도 아버지에 대한 믿음 안에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믿음을 준 이는 ‘로젠 선생’이었습니다.
데이빗은 아버지보다 로젠을 믿고 아버지와 관계를 단절합니다.
그러나 유학 중에도 여전히 아버지에 얽매여 라흐마니노프를 쳐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로젠과 아버지 모두를 만족시키고 싶었던 데이빗은 연주를 다 마치고 정신이상이 됩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아닌 로젠 선생을 더 믿은 아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 휴식 같은 사람, 혹은 양식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본래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게 자신만을 믿게 하는 아버지를 두고 있습니다.
‘자아’라고 합니다.
그 아버지에게 묶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남에게 이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도 본성적으로 또 자기만을 아는 사람으로 되돌아옵니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다가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데이빗처럼 미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로젠 선생을 만나야 합니다.
로젠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 우리가 이웃을 위한 휴식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양식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믿게 만드는 씨앗과 누룩을 넣어주시는 분이 그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만이 우리를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화시켜줍니다. 
 
인간은 누구나 믿음에 의해 모기이든 예수이든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믿음에 지배를 받는 나라입니다.
그 믿음은 주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집니다.
내가 나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는 만큼 그 열매가 자라나 그리스도처럼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가지게 만드실 믿음, 그것은 나도 그리스도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지배받으면 휴식이고 양식이신 그리스도처럼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됩니다.
그 사람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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