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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0-24 조회수 : 749

십일조는 교만도 꺾는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창조된 목적대로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창조자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보답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법칙이기 때문에 요행이나 예외규정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믿지 못하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만 특별하여 예외규정이나 요행을 따르려는 마음인 ‘교만’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 비유를 드십니다.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자신만 특별하다고 믿는 교만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적게 던, 많게 던 매를 맞습니다. 
 
‘교만’은 성경에서 ‘도시’나 성곽의 ‘탑’으로 상징됩니다. 
바벨탑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탑이 허물어져야 교만이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복음에서 숫자 ‘18’은 ‘힘을 잃게 만드는 영’과 관련이 있습니다. 
13장에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루카 13,11)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병마”의 희랍어는 “병(힘이 빠진)의 영”입니다.  
 
‘18’년은 분명 참 능력이요 힘인 성령을 잃게 만드는 마이너스 에너지와 관련됩니다. 
자아가 품어내는 병의 영에 사로잡히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힘을 잃습니다. 
하느님 영과 육체의 에너지는 서로 반대됩니다. 
 
저는 ‘18’을 ‘6+6+6’으로 봅니다. 
‘6’은 동물의 본성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것은 ‘세속+육신+마귀’인 것입니다. 
제물이란 이 삼구(三仇)를 죽여 그 피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되지 않으면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의 완성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어떤 누구도 사랑의 계명으로 파견될 수 없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인데, 교만이 죽어야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기에 하느님 자녀로의 소명으로 파견될 수가 있습니다.  
 
꽃이 떨어지지 않으면 열매가 맺힐 수 없듯, 삼구를 죽이지 않으면 깨어있지 못하게 되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길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엔 ‘호크 아이’와 ‘블랙 위도우’가 서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겠다고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주 절반의 생명을 날려버린 ‘타노스’를 이기는 방법은 6개의 ‘인피니티 스톤’을 다 모으는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의 인피니티 스톤은 
누군가의 피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대신 절벽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희생만이 인피니티 스톤을 차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 나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또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언 맨이 타노스의 손에 있는 인피니티 스톤이 박힌 장갑을 빼앗아 타노스를 칩니다. 그러면 타노스가 죽지만 자신도 죽을 것을 압니다. 
자신이 죽어야 모든 죽었던 생명이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아이언 맨은 자신이 죽고 많은 이들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패러디 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영화에 이런 설정이 들어있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 
그래서 뭔지 모를 이 법칙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오고 사람들은 이것에 감동합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어떠한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을 죽여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첫 행위가 봉헌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의 삶은 봉헌으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제물에 피가 섞이게 하는 것’이 회개의 행위입니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피가 섞인 제물’이란 
‘나의 죽음을 위한 봉헌’이란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은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제물 봉헌과 선교 소명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봉헌이 없으면 선교의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봉헌으로 나의 교만의 탑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이도 손쉽게 오를 낮은 산도 힘들어서 오르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 동기들과 놀러 가서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특별하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끝까지 남아 누구보다 많은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약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버텨 2시간 자고 산을 오르는데 땀에서도 술 냄새가 났습니다. 
더 오르면 토할 것 같아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어떤 좋은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어떤 목적이든 그것을 이루려면 자기를 포기하는 제물 봉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입니다. 
오류가 없고 예외도 없습니다. 
 
자신만 특별하다고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자신을 죽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포도밭의 한 무화과나무’처럼 잘리게 될 것입니다. 
자아를 죽여 그 피를 선악과와 섞어 주님께 봉헌해야만 
자신 안에 들어오시는 성령의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를 뱀으로 보고 그 피를 선악과에 섞어 봉헌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선악과는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십일조로 이어져야 하고 그 십일조에 반드시 자기를 죽이려는 의도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할 줄 안다면 열매 맺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피가 섞인 제물을 봉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 봉헌해야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그래야 그분 뜻이 내 안에서 실현될 준비가 됩니다.  
 
주님은 뱀과 같은 방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715) ‘십일조’를 자신을 죽이는 회개의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 피가 빠져나간 만큼 주님의 뜻이 머물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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