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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1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0-17 조회수 : 815

세상에서 세상을 거슬러, 교회에서 교회를 거슬러 
 
 
오늘 복음의 핵심구절은 이것일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슬러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더 모호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을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설명해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며칠 동안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사람을 심판하지 못하게 되고 또 사람들의 평가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면 분명 나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그것은 분명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막는 것이 그분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알려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신다면, 성령님은 그 진리를 세상을 거슬러 선포하게 만드는 일종의 ‘충동’이라고 할지라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충동이 일어남에도 세상의 박해가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것이 성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 교육에 관해 어쩌면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외치고 있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바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한국 교육에 있다고 말하는 ‘김누리 교수’입니다. 
그가 비록 너무 독일의 교육문화와 우리 교육문화를 대비하는 것에 지나친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가 주장하는 것들은 분명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일대 교육의 혁명을 시작해야 할 시기라고 대부분 사람이 공감하게 합니다. 
 
그는 먼저 우리나라를 찾았던 ‘프랑코 베라르디’라고 하는 이탈리아 철학자가 우리나라에 대해 꼬집은 사회적 문제점을 그 시발점으로 잡습니다.  
 
그는 짧은 우리나라 체류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프게 우리나라의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한국이 세계 자살률 1위이고, 특별히 청년들과 노인들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데 대해 그 원인을 4가지로 들었습니다. 
 
1. 끝없는 경쟁, 2. 극단적 개인주의, 3. 일상의 사막화, 4. 생활 리듬의 초 가속화 
 
1. 한국은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죽기까지 서로 비교하며 끝없이 경쟁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경쟁이 고통스러운 것을 알면서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어쩌면 꼭 필요한 시스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경쟁보다 행복을 생각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2. 극단적 개인주의도 경쟁주의 문화의 산물입니다. 
경쟁하다 보면 개인주의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나만, 내 가족만, 내 자녀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극단적 개인주의는 생태환경을 파괴하여 함께 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개인적으로 보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미국인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돈 있으면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3. 일상의 사막화도 경쟁 때문에 발생합니다.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의 끝없는 경쟁에 함께 뛰어들어 바쁘고, 
아버지는 직장의 경쟁 속에서 밤늦게야 집에 들어옵니다. 
 
4. 생활 리듬의 초 가속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주의가 아니라면 ‘빨리빨리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급해서 모든 것이 편리해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급한 것 때문에 받게 되는 마음의 상처는 그렇게 빨리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것은 경쟁교육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김누리 교수는 시험이 없는 독일 교육, 누구나 대학에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잘 먹히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는 종사자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수 있는 말들입니다. 
교육에서 경쟁이 사라지면 학원이나 사교육이 사라질 테고 그러면 많은 실업자가 생기게 되며 그런 교육을 통해 이득을 보던 사람들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나라 교육에서 ‘경쟁’을 빼고, ‘연대와 협동, 공존’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이웃과 환경, 대인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탄생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교육, 정치교육, 생태교육’이 어렸을 때부터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은 감출수록 더 큰 문제를 유발하고, 
정치는 알지 못하면 유치한 지역감정 등으로 비화할 수 있으며, 생태교육은 하지 않으면 공멸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저는 여기에다 현실적인 ‘경제교육’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태인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주식을 가지고 실제로 투자하며 경제관념을 익힙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면 세상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 교육에도 경제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신자는 자신과 가족도 입지 못하는 비싼 옷을 사제에게 선물했는데, 그 사제는 훨씬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것을 받는 것이 마치 신자들이 쓰고 남아도는 돈으로 사 준 것처럼 여겨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 연봉 2억이 넘는 사람보다 실제로 제가 한 달에 개인적으로 쓰는 돈이 더 많다는 것에 놀란 일이 있습니다. 
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저속하다고 여겨 경제교육을 받지 않으면 마치 성에 관해서 그런 것처럼 속으로 썩어 들어갑니다. 
 
어제 제가 수원교구 사목연구소 청소년 파트에서 주관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유튜브 채널 ‘어안채’에 초대되어 녹화하고 왔습니다. 
거기에서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더욱 교회를 멀리하게 된 청소년들에게 다시 교회에 돌아올 수 있도록 어떤 조언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한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에게 해 줄 말은 없습니다. 
다만 교회가 먼저 회개하여 청소년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말 잘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때는 성령께서 함께하셨던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거지처럼 동냥하는 수도회를 만들겠다고 하니 당시 세속에 찌들었던 교회가 허락해 줄 리가 만무했습니다. 눈엣가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마음속에서 끌어 오르는 그 성령의 이끄심을 거부했다면 프란치스코는 성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배움을 멈추기 위해 귀를 막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무시이고 모독입니다. 
그러나 이미 확신하고 끓어올라 말해야만 하는 진리에 대해 입에 재갈을 채운다면 그것은 성령에 대한 모독입니다.  
 
모르면서 짓는 죄는 큽니다. 그러나 알고도 박해가 두려워 말을 못 한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거의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수준의 죄가 됩니다. 
 
물론 마르틴 루터처럼 교회를 뛰쳐나가며 비판하면 안 됩니다. 
나라를 뛰쳐나가서 하는 소리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비판은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의 진리를 무시하며 성령의 충동에만 치중하는 균형 잡히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먼저 존중한다면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모독하지 않으려면 ‘교회 안에서’ 쇄신되어야 할 것들을 박해를 각오하고 ‘외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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