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6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2,1-7
왜 안 믿으면 위선자가 되는가?
지금까지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신앙을 질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위선이란 거짓말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하는 것이 위선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짓은 곧 드러나게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위선자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위선의 의미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넷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한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들어오더니 자신을 가리키면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알았지?”
이 말을 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너무 기분이 상했습니다.
자신은 유학도 다녀온 학생이고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도 일류대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중국인들로 보이는 이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중국 유학을 했기 때문에 일부러 유창한 중국어로 주문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본 그 아주머니는 아주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글에서 그 아주머니에 대한 질타는 계속 이어집니다.
여기서 누가 더 위선자일까요? 아주머니일까요, 아르바이트생일까요?
물론 어머니도 잘한 것은 없지만, 더 위선자는 아르바이트생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어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높이려 한다는 말은 스스로 낮게 느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 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위, 즉 위선입니다.
저도 로마에서 공부할 때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키 작은 동양인으로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을 때, 카페나 식당에 가면 주문을 영어로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눈이 동그래지며 집중해서 주문을 받습니다.
영어만 해도 존중받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영어를 잘 못 알아들을 때는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설명을 해 줍니다.
그 사람이 볼 때 얼마나 재수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몇 년 동안 당한 설움을 이런 것으로 갚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위선입니다. 위선은 그러니까 열등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에 대한 낮은 평가를 높여보려고 자신을 증명하려 노력하는 것이 위선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알고 초대한다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위선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이런 위선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솔직하려고 노력하면 될까요? 안 됩니다.
사람은 본성상 인정받으려 사는 존재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정을 받아야만 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빈 화분』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한 아이가 꽃을 무척 사랑해서 꽃을 키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아이가 키우는 꽃들은 언제나 가장 좋은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그 나라의 임금도 꽃을 좋아했습니다. 궁궐의 정원은 온갖 희귀하고 예쁜 꽃들로 가득했습니다.
문제는 임금이 자녀가 없어 후계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임금은 자신이 아끼는 꽃들을 보며 꽃을 잘 가꿀 수 있는 아이를 찾아 후계자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방을 붙여 꽃을 잘 키우는 아이들은 다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각양각색의 꽃씨들이 들어있는 항아리에서 아이들 각자에게 하나씩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 년 뒤 가장 예쁘게 꽃을 피워오는 아이에게 나라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주인공 아이는 작은 화분에 가장 비옥한 흙을 넣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화분에 넣은 꽃씨에서는 새싹이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몇 달 뒤, 아이는 꽃씨를 더 큰 화분에 옮겨 심었습니다.
겨울이 지나가도 그 화분에서는 꽃이 자라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봄이 오자 다른 아이들은 각자가 피운 꽃들을 들고 임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임금님 표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주인공은 감히 임금에게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빈 항아리라도 들고 임금에게 가보라고 권합니다.
아이는 맨 마지막에 빈 화분을 들고 임금에게 나아갑니다.
임금은 크게 기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준 꽃씨들은 다 삶은 것이었느니라.
꽃을 예쁘게 피우는 것보다 진실한 마음이 더 아름다운 것이니라.”
이렇게 그 나라는 진실한 아이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아이가 진실할 수 있었던 이유는 최선을 다한 자기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존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진실하게 만듭니다.
열등감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면 진실해질 수 없습니다.
나의 가치는 내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나의 가치를 증명해 줄 유일한 분이 하느님임을 안다면 솔직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으면 더는 사람들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하늘의 임금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하늘 나라를 상속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빈 항아리가 오히려 큰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런 비천한 나를 인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나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나를 인정해주신 분을 드러내려 힘씁니다.
나는 드러낼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만이 위선적인 삶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고 하십니다.
진실해지려고 진실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부터 인정받는다고 진실해지지 않습니다.
더 위선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평가는 나의 위선을 키우는 물주기에 불과합니다.
더 높은 존재에게 인정받아야만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임금이신 하느님께 인정받아야 진실해집니다.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참 자유인이 되는 길은 오직 주님께서 나를 인정해주심을 믿는 길뿐입니다.
그 방법은 그분께서 항상 내 곁에 계시며 나를 인정해주시기에, 나는 그 기쁨에 쉬지 않고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돌리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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