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갈라티아 3. 7-14
루카 11,15-26
개인의 성장은 공동체 속에서만 가능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 유다인들 중 일부는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공동체도 똘똘 뭉치고 어둠의 세력도 똘똘 뭉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반면 유다인들은 어떠한 공동체에서도 분열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사탄의 무리도 서로 내쫓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사실 악마의 세력들도 빛과 맞서기 위해서는 똘똘 뭉치지만 그런 일이 끝나면 서로 분열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일치시키는 힘은 각자의 생존을 위함이지 공동체를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공동체라기보다는 떼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공동체에 들지 않는 사람이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인 성령으로 똘똘 뭉쳐 악을 쳐 이기는 당신 편에 서라고 당부하십니다.
구원이 개인적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실상 구원은 공동체를 통해 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성장하려는 것보다 공동체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사실 어떠한 개인이든 공동체 속에서만 성장합니다.
코로나로 공동체 신앙이 흔들리는 이때,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하려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개인적 역량을 발휘하는 나라는 이스라엘입니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칼 막스, 스티븐 스필버그, 빌 게이츠 등 그들의 역량은 시간과 분야를 초월합니다.
미국 유명 대학의 30%, 노벨상 수상자의 30%, 미국 최고 부자의 30%가 유대인입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1/4밖에 안 되고 평균 아이큐도 95밖에 안 되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를 휘어잡고 있을까요?
이들이 이런 역량을 발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존감과 직결됩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가 하는 믿음이 자존감입니다.
그들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만큼 성장합니다.
코이 물고기가 자신이 담긴 그릇만큼 몸을 성장시키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이냐의 믿음에 따라 딱 그만큼만 성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 믿음을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깁니다.
서기 70년 로마군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랍비 요한나 B. 자카이는 예루살렘은 망해도 유대 민족이 망하는 것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로마 군사령관인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나기 위해 관속에 들어가 죽은 사람 시늉을 하며 예루살렘을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나 “황제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마침 그때 이전 황제가 죽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자신이 황제가 될 것인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며,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랍비 자카이는 “이스라엘에 조그만 도시 야브네에 있는 대학과 성서와 책만은 불사르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것은 믿음이지 땅이 아니란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2천 년간 나라 없이 살면서도 많은 박해를 받기는 하였지만 나라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들이 전하는 믿음과 하나였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자 주변 아랍국가들은 일제히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벌여왔습니다.
다 합치면 수억 명에 달하는 아랍인들이 4백만 명의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더 많은 땅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 이유는 전쟁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국에서 몰려들었고 아랍인들은 자신이 살자고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없으면 자신들도 없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선택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전수되는 것이 공동체를 통해서입니다.
특별히 가족 공동체는 한 나라와도 같은 중요한 믿음의 전달체입니다.
공동체가 없다면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전수되기 때문입니다.
EBS의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실험한 적이 있습니다.
능력이 뛰어난 개인들이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함께 공부한 아이들의 성적이 더 좋게 나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메타인지 때문입니다.
메타인지란 내가 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혼자 공부하면 자신이 다 아는 줄 알지만, 타인과 대화하다 보면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되고 그것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유태인들은 이미 ‘하브루타’라는 토론식 공부로 모든 것을 공동체를 통해 전수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개인 경쟁 위주의 공부는 무엇이든 공동체로 하는 이들을 넘기 어렵습니다.
[참조: 『유대인 부모처럼』, 장화용, 유튜브 ‘책 읽는 다락방 J’]
부모가 사이가 좋고 자녀에 대한 사랑이 잘 전수되는 가정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할까요, 아니면 사이가 좋지 않아 자녀들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는 가정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잘할까요?
아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이 가정 분위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면 모기와 같이 이기적으로 됩니다.
그러면 머리도 그것밖에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살면 창의력이 발휘되고 지치지 않는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공동체 의식이 좋은 아이가 창의력도 좋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결혼할 때 신랑이 ‘케투바’(ketubah)라는 혼인 서약서를 낭독합니다.
여기에 이혼할 때 대부분 재산을 아내에게 위자료로 준다는 내용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이혼률이 가장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크게 소리 높여 말하게 합니다.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만 성장합니다. 믿음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전수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큰 역할을 하신 분들은 자기의 영예를 세우려 한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위한 분들이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돌아가실 때 “저는 결국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공동체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믿음을 전수받을 수 있고 그 믿음이 그 사람을 성장시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보다 당신 공동체에 참여하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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