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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10-07 조회수 : 706

10월7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1,1-4 
 
주님의 기도는 나침반이다 

오늘 복음에서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이 말은 스승마다 기도가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기도를 바치는 것이 스승과 하나 되는 어쩌면 유일한 길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승이 주는 기도는 그 스승을 향할 수 있게 만드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기도가 나침반이 되는 이유는 기도 안에는 청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청하느냐가 나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사람이 먹다 버린 음식만을 원한다면 개일 가능성이 큽니다.
썩은 고기만 원한다면 그것은 하이에나일 가능성이 큽니다.
피만 원한다면 그것은 모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듯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내가 장차 무엇이 되는지 알려주는 척도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 자녀의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이 기도 안에서 청하는 것을 나도 청하면 내 존재가 하느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에 전해준 십계명과 같습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 하느님의 계명이 다 들어있고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청하면 하느님의 자녀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자아를 따라 사탄이 되게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합니다. 
 
만약 이 기도를 모르고 무조건 잘 살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진리를 잃은 사람처럼 되어 완전한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갈 때 나침반을 가져가야 하는 것처럼, 인생을 살 때 주님의 기도를 가져가야 길을 잃는 일이 없습니다. 
 
일본 어느 영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남편의 제자가 남편을 보겠다고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비가 너무 와서 길이 침수되어 남편에게 그날은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제자도 집에 돌아갈 수 없어서 그 집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둘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자 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남편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내는 아침에 가방을 싸고 있었습니다. 놀란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떠나 친정집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는 이유를 묻자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용서했어요. 그런데 잠잘 때 내 살이 닿자 당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괴로워했어요.
당신은 나를 용서하느라 너무 고통을 받고 있어요.
그 고통을 덜어주려면 내가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정말 아내를 용서한 것일까요?
용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에는 어떤 청원이 나옵니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남편은 자신은 죄인이라 여기지 않는 상태에서 아내를 용서하려 하니 잘 안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오십보백보입니다. 크나 작으나 다 죄인입니다.
남편이 주님의 기도를 알고 꾸준히 바칠 수 있었다면,
아내만 그렇게 죄인으로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우리의 방향을 명확히 잡아줄 나침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영화 ‘사도’(2015)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만 잘못하고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무덤에 오랫동안 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의 탓도 있습니다.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했다면 모든 인간이 주님께서 악에서 구해주어야 하는 상태임을 알고
더 자비로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파라오는 우리를 지배하는 하나의 욕구를 대변합니다.
파라오는 우리가 그 욕구를 채워줄 때마다 웃어줍니다.
그러나 그다음 날이면 다시 그 욕구를 채우라고 채찍을 듭니다.  
 
자아의 지배하에 사는 사람은 모두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를 위해 나침반을 가져오셨습니다.
이 나침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십계명과 같습니다.
십계명을 따르면 파라오의 욕구를 따라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두 법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세로서 주신 계명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따르면 예수님에게로 향할 수 있고 결국 아버지께로 향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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