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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9-26 조회수 : 571

​불편하지 않은 진실은 없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기적과 이적에 놀라워하고 있었습니다. 
반전을 좋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필 이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스승을 따르는 기쁨에 취해있던 제자들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해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무지(無知)라고 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을 영적인 무지라고 합니다. 
어떠한 것이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스트레스를 원하지 않으면 진리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등 뒤에 항상 십자가를 숨기고 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십자가의 신비에 관해 묻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진리를 알고 싶어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진리들을 거부한다면 마지막 때에 진리 자체이신 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손에 넘겨지셔야 하는 이유에 관한 것은 성경에 수 없는 예시들이 나옵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과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아비멜렉은 이 세상의 왕에게 아무 힘도 없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는 자신의 여동생이니 맘대로 데려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아내를 그렇게 쉽게 빼앗기는 무력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왜 남의 아내를 탐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몰랐다고 항변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죄가 아니란 소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죄사함의 중재를 부탁해야만 죄가 사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모르고 한 모든 행위도 하느님께 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싶어 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갈 때 하느님께 많은 것을 해 드린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하는 성체에 감사를 드리지 못한 순간순간이 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치 아브라함의 사라처럼 무기력하게 넘겨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어드려도 마땅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관계가 완성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도 그렇게 계약을 맺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빚진 것을 깨달아 봉헌할 줄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진리라는 이름을 가지셨다면 우리는 진리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 이전의 내가 무지요 어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무지한 우리를 빛으로 밝혀주려고 옵니다. 
무지한 자아가 죽기를 원하면 진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영화 ‘조커’에서 한 남자가 왜 무자비한 악당이 되어가는지를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영화에서 이 남자는 착하디착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시대와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간다고 표현하려 합니다.  
 
하지만 조커가 빠져있었던 것은 ‘지나친 자기애’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자아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는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진리는 자아를 죽이는 칼과 같습니다. 
그러니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를 원치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찌르는 칼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지식은 이제 어둠만 더 짙게 만듭니다. 
 
조커에겐 엄마가 있습니다. 
조커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늘 웃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엄마는 토마스 웨인이라는 시장이 그렇게 잘 지내는 것은 자신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잠깐 그 집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커는 엄마의 편지를 보고 자신이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라고 믿게 됩니다. 
조커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피해자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더 많이 주고 더 많은 것을 빼앗긴 억울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냉혹했습니다. 
토마스 웨인은 조커의 엄마가 과대망상증으로 미쳐있었고 조커는 입양한 아이라고 말해줍니다. 
조커는 혼돈에 빠집니다. 엄마의 병력을 확인합니다. 
사실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선해지고 싶거나, 더 악해지려거나. 여기서 조커는 악해지기로 했던 것입니다. 
자기도 과대망상증에 빠져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토마스 웨인의 말대로 엄마는 자기애 과다 성격장애였고 밥도 안 주고 자신을 폭행하여 
자신의 뇌까지 손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살해합니다. 
 
만약 토마스 웨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고 그 많은 돈으로 병원의 기록까지 고쳐버렸다면 어쨌을까요? 조커는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은 것입니다. 
악당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진리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나를 죽이고 싶은지, 타인을 죽이고 싶은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참 진리는 나를 죽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커는 어머니를 죽이며 해방감을 느끼고 기뻐합니다. 
나를 죽이며 기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리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진리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러면 영원히 그 불편했던 진리와 헤어져야 합니다. 
그곳이 지옥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진리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불편한 진리를 향한 나의 문이 열리고 참 진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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