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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09-25 조회수 : 588

9월25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9,18-22 
 
하느님 현존 연습  
 
진화론에서는 모든 것들이 ‘저절로’ 진화, 발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태어나서 부모 없이도 저절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진화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화할수록 부모에게 더 의존합니다.
어떤 인간도 부모 없이는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현존 안에서 두 발로 걷고 말도 하고 사회생활도 배웁니다.
부모의 ‘부재’(不在)는 아이들을 다시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반대로 부모의 ‘현존’(現存)은 아이들을 부모의 수준이 되게 만듭니다.
앞에서 끌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혼자서는 진화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혼자 기도하시지만 실제로는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현존 연습’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의 ‘법’(法)이 함께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사람이 지닌 뜻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이 됩니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과 친구가 된다면 그 친구도 다이어트를 할 확률이 45%나 된다고 합니다.
저도 살을 빼니까 주위에 살을 빼는 분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함께 머물면 이렇듯 변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세례자 요한처럼 될 수도 있고, 엘리야처럼 될 수도 있으며, 예언자 가운데 한 분처럼 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자녀까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함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온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세상 누구보다 힘이 듭니다.
하느님을 옆에 두고 사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니 하는 일뿐만 아니라, 생각과 욕구에서도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그 마음마저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물으시고 곧바로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누구도 베드로만큼 빨리 하느님의 자녀로 변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래서 교회의 반석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의 현존 안에서 아기가 인간으로 자라나듯,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삽니까?
얼마나 기도합니까? 자주 주님의 현존을 잊고 내 뜻대로 살아서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기도하며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개신교 책 중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 있습니다.
1605년 프랑스 로렌느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에 있는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의 평수사로 살았던 로렌스(Lawrence) 수사의 영성을 담은 책입니다.  
 
그는 전쟁에 참여했다가 상처를 입고 평생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리고 50세라는 늦은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가 주방 허드렛일이나 신발을 수선하는 일을 하면서 매우 빠른 영성의 진보를 보입니다.
장상의 명으로 이것을 기록한 것들이 지금 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하느님을 느낀 것은 나무를 보면서였습니다.
잎이 떨어지고 다시 나고 하는 이 순환 속에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시작한 수도 생활 안에서 오랜 기간 쌓여온 세속의 때는 좀처럼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세속의 삶이 그리워졌습니다.
주방 허드렛일이 의미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믿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마치 나무를 보고 주님을 느꼈듯이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느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의미 없게 느껴지던 일들이 참으로 달고 기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거창하고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할 때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하나 줍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그의 변화에 많은 형제가 감명을 받았고 그 방법을 묻자
“매 순간 호흡할 때마다 하느님의 현존을 연습하는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영성과 기도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왠지 저에게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저는 현존을 연습하기로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일하는 시간이 기도 시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성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처럼 깊은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소유합니다.  
 
저는 세상에 하느님과 저밖에 없는 것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자상한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자녀로 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 훈련이 쉽고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훈련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 훈련을 계속해나갔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연습하는 이 훈련을 제 본업으로 생각하고, 마치 하루 전체가 정해진 기도 시간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오로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 살아오다 보니 때로는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이 몰려옵니다.  
 
가끔 제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을 잊기라도 하면 하느님은 즉시 저의 내면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고백 드립니다.  
 
‘하느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온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기쁘신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러면 곧 사랑의 하느님은 저의 고백에 흐뭇해하시며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편히 쉬며 거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아주 작은 고난도 주님을 위해 받을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저는 앞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할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며 나머지 것은 아무것에도 정신을 주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소명과 의무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출처: 『로렌스 형제의 생애; 하나님의 임재 연습』, 유튜브 성결출판사] 
 
 
현존 자체가 법입니다.
법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진화시킵니다.
그 현존을 연습하고 체험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라고 말합니다.  
 
현존 연습을 하며 모든 시간이 기도와 찬미와 사랑이 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누구를 두고 살아갑니까?
자아라는 뱀일 수도 있고, 사랑의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내 곁에 누구를 두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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