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복음: 루카 9,23-26
연습의 종교인가, 실전의 종교인가?
저는 가끔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것은 교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은 아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라고 따집니다.
저는 이때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교리서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데도, 교회 내에서 오히려 그 교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밀떡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로 불릴 수 있다면, 그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도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또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빌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795)라고 말합니다.
또,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 믿음을 신자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과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이 큰 차이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에 불과하다’는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을 넘어서서 하느님 본성에 참여한다’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만 가지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은 의미를 잃습니다.
정체성이 바뀌어야 본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라서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아이가 그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으로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수많은 다중 인격 속에서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자신이 개인지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옵니다.
22세의 의대생이었던 스티븐 D.는 약물중독으로 거의 완벽한 개의 경지까지 갔었습니다.
개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꿈을 깨고 나니 개의 모든 감각, 특별히 후각이 인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
모든 향수의 냄새를 다 구별하게 되었고, 환자들을 눈을 감고 냄새로 다 구별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간 길을 다시 냄새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주 동안 이 일을 겪고 나서 약물을 끊고 신경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자녀에게 개 짖는 소리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정말 자신이 믿는 정체성대로 되어 갑니다.
사람 흉내를 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라 믿어야 사람인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만약 이 믿음을 주지 못하면 교회는 그저 껍데기만 남습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훈련만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믿게 만들면 훈련이 아니라 실전을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어떤 종교가 진짜 종교일까요?
한국 가톨릭교회는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선교사들이 주체가 되어 소극적인 선교지역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학자들이 먼저 천주교를 연구하여 받아들이는 쪽이 더 적극적으로 교회를 불러들였습니다.
처음 천주교를 접하고 연구했던 이들은 대부분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이었습니다.
실학자들은 당시 조선 시대 성리학의 공리공론에 지쳐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에 진저리가 나서 더 실용적인 학문을 찾다가 서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성리학보다 천주교가 더 실용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천주교를 통해 어떤 이익을 보려고 했던 것일까요?
성리학이 그들에게 해 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성리학은 사물의 생성과 소멸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고 말합니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 ‘이’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 법칙이 되기도 합니다.
좀 복잡하게 들리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理)는 ‘진리’를 나타내고, 기(氣)는 ‘힘’을 나타냅니다.
진리는 말씀이고, 힘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성리학에서도 이와 기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 학문이 실용적인 면을 잃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실용적인 면을 잃게 되는 이유는 ‘실전’을 게을리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무술의 창시자들은 당대 엄청난 무술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창시한 무술들은 시간이 지나며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실제 대련은 소홀히 하고 그 형식에만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연습만 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가보면 여기저기에서 마을 사람들이 태극권을 수련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최고 부자인 마윈도 태극권을 신봉하고 뛰어난 무술로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태극권 무술 고수와 격투기 선수와 시합을 하였는데 몇 초도 안 돼서 쓰러져 정신 못 차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상들이 유튜브에 엄청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무술의 창시자들은 분명 뛰어난 무공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끊임없는 실전을 통해 발전하지 않으면 그저 실전에는 쓸모없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성리학도 그렇게 처음에는 모든 이들에게 실용적으로 삶에 적용될 수 있는 학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양반과 상놈을 나누는 데 이용되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데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성리학이 탁상공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리학이 창조와 운동, 소멸의 원리였다면 그것이 그것을 공부하는 이들 각자 안에서 실용적으로 적용이 되게 해야 했습니다.
연습만 하고 실전에 쓰이지 못하면 시간과 함께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에 한국의 실학자들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는 천주교가 더 실천적이요, 실용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받아들여 보니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이기고 더 높은 경지로 오를 수 있게 해 줌을 삶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천진암에서 천주교를 연구했던 이벽과 정도전과 같은 분들은 철저한 자기를 이기는 삶을 수련하였고 천주교가 실전에서 매우 실용적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천주교는 사제가 없는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도구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그렇게 순교자가 많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종교가 하나의 연습의 도구가 아니라
실전의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약간은 당시 성리학과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살게 만들려고 연습만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진짜 싸움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들은 아직도 연습만 하고 자신을 죽이거나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진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명확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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