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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09-07 조회수 : 540

9월7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1코린토 5,1-8
루카 6,6-11 
 
나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심리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자존감이 낮은지, 높은지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녀나 직장에서 책임자의 위치에 섰을 때는 그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방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치 나무 분재를 하듯 사람들을 통제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들은 아주 작은 일에까지 간섭하지 않으면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앞에서 통제를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자존감을 상실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습니다.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의 저자 아른힐 레우뱅은 끊임없이 통제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누구에게라도 통제되어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통제권을 자기 내면의 폭군이자 자아인 ‘선장’에게 내맡겼습니다.
통제권을 상실한 아른힐은 선장이 시키는 대로 밥 대신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선장은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니?”라고 다독입니다.
이렇게 벽지라도 뜯어먹으며 배를 채우게 한 선장은 으쓱해집니다. 
 
그런데 선장과 같이 자신을 통제하려는 사람이 주위에 너무 많았습니다.
자주 자해를 하는 덕에 아른힐은 정신병원에서 1년 동안 햇빛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독방에 갇혀 있거나 지독한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자기 자유의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자해하는 것과 약을 거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물론 자해할 수 있는 어떤 물건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른힐은 마지막 남은 통제권인 약을 먹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때마다 간호사들은 그의 목을 누르고 주사를 놓았습니다.
매우 아프기도 했지만 그 굴욕감이 더 아팠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신의 선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른힐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한 때는 자신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사람을 한 명, 두 명 만나면서부터입니다.  
 
한 번은 경찰 두 명과 여섯 명의 간호사가 아른힐을 붙잡고 병실로 옮겼습니다.
아른힐은 아이 한 명에 어른 여덟 명은 좀 비겁한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그때의 의사는 아른힐을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덟 명의 어른들은 아른힐이 또 자해할까 봐 놓아주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사흘 동안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했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아른힐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미안하다고 사과하였습니다.
이렇게 느낀 자유는 아른힐에게 조금 더 살아도 되겠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또 어떤 간호사는 아른힐과 함께 산책을 해 주었습니다.
보통은 간호사가 아른힐의 손을 묶고 그 줄을 자신에게 묶어서 함께 산책하러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볼 때는 굴욕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간호사는 자해할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는 자신을 믿어주었습니다.
줄도 풀어주었고 걸으면 함께 걷고 뛰면 잡지 않고 옆에서 함께 뛰어주었습니다.
그 간호사 앞에서는 자해하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았습니다. 
 
병원에는 유리나 사기로 된 접시나 잔이 없습니다. 그것을 깨서 자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어머니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넌 내 딸이다. 난 너를 믿는다”라고 하며 가장 귀한 사기로 만든 잔에 커피를 주었습니다.  
 
물론 아른힐은 그렇게 믿어주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며칠 전 사람들이 실험한답시고 유리잔에 커피를 따라주어 아른힐이 그들의 믿음대로 그것을 깨서 자해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나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 자유가 나의 자존감이 됩니다. 
 
이렇게 아른힐은 수많은 자살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 덕분으로 자기를 믿어주는 몇몇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힘이 되어 불가능하다고만 했던 조현병을 이겼고, 공부를 하여 심리학 교수가 됩니다.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 중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유를 빼앗기면 존엄성이 빼앗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남을 통제하면서 자신들이 유용하고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려 합니다.  
 
자신의 열등감을 남을 통제하며 극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통제되는 사람들은 점점 자기가 존중받을 사람임을 잊어갑니다.
믿으면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 자유가 자존감을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통제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불쌍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통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신이 통제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법으로 예수님을 통제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율법으로 무조건 통제만 해 왔던 이들은 무엇이 옳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 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가 자신의 주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나를 통제하려는 사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주는 분을 따를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은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이들 가운데서 그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손을 뻗습니다. 
 
우리의 통제권을 남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바로 그 오른손입니다.
오른손은 의식을 나타냅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나의 통제권을 자아나 나를 통제하려는 사람에게 맡겨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나를 통제하려는 것들에서 벗어납시다.
우리는 누구의 노예가 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하느님 아닌 것에 통제받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폭군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러 오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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