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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9-06 조회수 : 551

9월6일 [연중 제23주일] 
 
에제키엘 33,7-9
로마 13,8-10 
마태오 18,15-20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의 의미 
 
 
오늘 복음은 ‘교회란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려줍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도 작은 교회라 하고, 소공동체도 작은 교회라 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주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이기 때문에 굳이 가톨릭교회에 속해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모이면 그것이 교회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는 실존 인물 ‘제리 콘론’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먼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970년 당시 잉글랜드는 400년이 넘게 아일랜드를 점령하고 심한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민간인과 영국군의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무직자인 제리 콘론은 지붕을 뜯어내 파는 좀도둑이었습니다. 
그런데 총으로 영국군을 저격했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또 도망가는 중에 독립 시위를 하는 틈에 끼여 폭동 주동자 혐의까지 받았습니다.  
 
이렇게 아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계속 일어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잉글랜드에 있는 작은어머니 집에 보냅니다. 
아버지에게 제리는 나이 먹고도 철없는 어린애 같고, 제리 입장에서 아버지는 잔소리와 억압을 하는 존재입니다. 
 
제리는 배에서 폴이라는 친구와 마주칩니다. 
제리는 작은어머니 집에 가지 않고 폴과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히피족들과 어울려서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히피들조차 아일랜드인에 대해 차별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다시 런던 시내를 방황하던 제리는 길에서 우연히 화류계 여자의 집 열쇠를 줍고, 그 집에 몰래 들어가 돈을 훔칩니다. 
 
그런데 이때 런던 길포트 테러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리는 훔친 돈으로 옷을 사 입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 폴이 경찰에 잡혀갔고, 영국 경찰이 제리의 집에도 들이닥쳤습니다.  
 
영국 경찰은 아버지를 쏴버리겠다는 협박과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공범으로 몰려 온 가족이 감옥에 갇힙니다. 
사형제가 폐지되었기에 종신형을 받고 제리는 아버지와 함께 수감생활을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종교의 힘으로 아들을 위로합니다. 
 
그렇게 14년이 흐릅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는데, 그가 15년 전 런던 길포드 식당 폭탄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고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이 일로 제리는 지금까지 포기했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제리는 변호사 가레스에게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동안의 모든 일을 녹음해서 보내고, 변호사도 애초에 사건 수사 자체에 문제가 있었음을 밝혀냅니다. 
가레스는 끈질기게 진실을 파헤쳤고, 결국 1976년에 항소심에서 제리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은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제리 콘론은 한 마디로 동네 양아치였습니다. 
물론 억울하기는 하였으나 밖에서 사나 감옥에서 사나 그에게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은 괜찮으나 죽은 아버지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아버지의 이름으로’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이 무죄를 받아내야 아버지도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은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명예가 곧 아버지의 명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을 잘못 해석하였습니다. 
교회를 그냥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분의 명예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명예란 ‘하느님’으로서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이 권한으로 살라는 것은 곧 당신으로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의 권한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명예가 교회를 통해 회복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하여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고 하십니다. 
 
교회가 당신 권한을 행사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의 권한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제리 콘론의 노력을 통해 아버지의 무죄가 증명되었듯,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권위가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름은 본성이고 권한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죄를 사하는 권한을 부정하였고, 교회를 통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한 것까지 부정하였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그런 권한을 부여하셨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교회의 사제였을 때부터 죄를 자신의 고행으로 용서받으려고 했지 교회에 부여한 그리스도의 권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이 빠진 교회라는 것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땅에서 맺고 푸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교회에 주시고 그것을 통해 죄를 사해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 권한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로는 가족이나 소공동체 등을 작은 교회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죄 사함의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톨릭교회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의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그분의 명예와 권한을 행사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되어야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의 명예이고 권한이고 본성입니다.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교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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