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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08-27 조회수 : 579
8월 27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1코린토 1,1-9
마태오 24,42-51 
 
나의 뜻은 수면제고, 주님의 뜻은 각성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 항상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있을 때와 잠자고 있을 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깨어있을 때는 있고, 잠잘 때는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의식’입니다. 
 
잠자면서도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자각몽’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꿈을 꾸면서도 의식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이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꿈이네. 그럼 이쪽으로 날아볼까?’라고 하면서 꿈도 조정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잠자면서도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깨어있으면서도 잠자는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할 때입니다.  
 
하와가 뱀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리고 그 선악과를 아담이 받아먹을 때는 깨어있으면서도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잠을 자는 상태입니다.
깨어있어도 내 자기 뜻에 묶여있으면 잠자는 것입니다. 
 
내가 의식해야 하는 것은 ‘뜻’입니다.
내가 내 뜻을 추구하고 있는지, 혹은 그 뜻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의식해야 합니다.
물건을 놓을 때 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디 놓았는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나는 항상 내 뜻을 만들어 나를 잠들게 만듭니다. 
 
'1408’(2007)은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은 한 작가가 겪은 무서운 일을 담은 영화입니다.
‘1408’은 한 호텔의 방 호수입니다.
그 방에 들어가면 1시간 내로 모두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사후세계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그 방에서 자보기로 합니다.
호텔 지배인은 말리지만 주인공의 고집이 너무 셉니다.
그래서 좋은 코냑 한 병을 선물로 주고는 허락합니다. 
 
그 방에 들어간 주인공은 온갖 환상에 시달립니다.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딸을 잃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화해해야만 한다는 죄책감과 딸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 방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와 화해하게 하고 죽은 딸이 살아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서운 시체로 변하고 오랜만에 가슴에 안은 딸은 재가 되어 산산조각이 납니다.
기쁨만큼이나 고통이 큽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과거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방에서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힘으로는 그 방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지배인이 준 코냑에 불을 붙여 방을 태워버립니다.
자신도 연기에 질식되어 갑니다.
감독판에서는 소방관에 의해 주인공은 가까스로 구조됩니다.
그리고 1408호에서도 자유로워지고 과거의 집착에서부터도 자유로워집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1408호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깨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수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우리를 깨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침착하게 자아를 성령의 불로 태워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아를 태워버릴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물론 나도 함께 죽는 것 같아 두려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습니다.
다만 자아의 욕구에 더는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아에게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절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아와 반대되는 새로운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보통 자아와 반대되는 의식적인 행동을 ‘오른쪽’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항상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깨어나게 됩니다. 
 
미국 어느 지역에서 장애 아이들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50m 달리기 경주가 열렸고 한 소녀가 1등을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나 1등 했어!” 
 
엄마와 아빠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울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너무 지나치게 감격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오늘 처음으로 말을 했어요.” 
 
아이는 부모가 바라는 것을 해 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비로소 자신의 방에서 탈출하여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자기만의 힘으로는 깨어날 수 없습니다.
나를 달리게 만드는 누군가의 뜻을 의식하고 그 뜻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있음은 ‘주님의 뜻을 의식하는 상태’입니다.
주님의 뜻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뜻입니다.
나의 뜻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믿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다면 뱀의 뜻을 따라줄 수는 없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식솔들을 맡기고 제때 양식을 내주게 하고 떠났다면
주인이 없어도 마치 주인이 있는 것처럼 그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먹고 마시며 식솔들을 괴롭히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매 순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을 의식하고 있다면 그것이 지옥 같은 자아가 만든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를 깨어있게 만드는 유일한 힘은 주님의 뜻입니다. 
 
자아의 욕구는 수면제이고 주님의 뜻은 각성제와 같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심판을 이깁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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