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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1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08-18 조회수 : 603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에제키엘 28,1-10
마태오 19,23-30 
 
하느님께서 부자를 구원하시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은 이런 불편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구원받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즉, 부자는 구원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부자도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쉰들러는 자신의 재산으로 1,100명의 유태인 포로들을 구출해 줍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아끼려 했던 차와 금 배치를 보며
그것까지 팔지 못한 것에 마음 아파합니다.  
 
정말 사랑이 있다면 가진 것을 나누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쓸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부자로 남아있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남아있는 재산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돈이 많은 사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주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구원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성경에서의 부자는 소유한 돈의 액수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믿는 것이 많을수록 부자입니다.
저는 행려자들 무료급식소에서 행려자들 사이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이들이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문지를 하나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신문지를 많이 가진 사람에게서 하나를 훔쳐 갔을 때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들이 부자입니다. 
 
이런 분들은 하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주님은 재산의 양을 줄여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재산이 그들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어 구원하십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에 ‘회심기’란 부분이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어먹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3년 전,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절의 경내지가 종단의 몇몇 사무승들의 농간에 의해 팔렸을 때,
나는 분한 생각 때문에 며칠 동안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전체 종단의 여론을 무시하고 몇몇이서 은밀히 강행한 처사며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눈앞에서 넘어져 갈 때,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도저가 산을 헐어 뭉갤 때, 정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웠다.
함께 살던 주지 스님도 다른 절을 맡아서 가고,
그 그늘에서 붙어살던 나는 그야말로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다른 도량으로 옮겨 차라리 눈으로 보지나 말자고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법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이 말이 떠오른 순간 가슴에 맺혔던 멍울이 삽시간에 술술 풀리었다. 
 
그렇지!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거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인연 따라 있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거다.
언젠가 이 몸뚱이도 버리고 갈 것인데.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전까지의 관념이 아주 달라졌다.
내가 주지 노릇을 하지 않고 붙어살 바에야 어디로 옮겨 가나 마찬가지 아니냐. 중생들끼리 얽혀 사는 사바 세계라면 거기가 거기지.  
 
그렇다면 내 마음 먹기 탓이다.
차라리 비리의 현장에서 나를 키우리라.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옛사람의 말도 있지 않더냐. 
 
이때부터 팔려나간 땅에 대해서도 애착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본래 사찰 소유의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도들이 희사를 했거나 아니면 그때까지 주인이 없던 땅을 절에서 차지한 것일 게다.  
 
그러다가 그 인연이 다해 내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경내지가 팔렸다고 해서 그 땅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니고 다만 소유주가 바뀔 뿐이다. 
 
이날부터 마음이 평온해지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
그토록 시끄럽던 불도저며 바위를 뚫는 컴프레서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들렸다.” 
 
이것이 부자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무엇이 있다고 부자가 아니고, 무엇이 없다고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내 것으로 생각하면 부자이고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가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자를 어떻게 구원해주실까요?
바로 당신이 ‘주(인)님이 되어주심으로써’입니다.  
 
신문지 하나도 내 것이라고 믿으면 부자이고,
수억 원의 재산도 주님 것이라 믿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 모든 것의 주님임을 일깨워주심으로써 우리를 가난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가난한 자 되게 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주님께 많은 것을 드린다고 착각했을 때 주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내 것’이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말이 이해되었습니다.  
 
종은 아무리 가져도 그 가진 것이 다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신 이는 그분의 종이기 때문에 일절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믿음을 주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가 받은 것 중 일부를 도로 봉헌함으로써 굳건해집니다.  
 
내 소유가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는 방식이 새로운 계약을 위한 선악과인
‘십일조’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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