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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8-07 조회수 : 707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나훔 2,1.3; 3,1-3.6-7
마태오 16,24-28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마음을 넓힌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영성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의 주인이었던 자아를 죽여야만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시기 위해 자기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표현이 좀 극단적인 것 같아서, ‘더 온화한 표현은 없을까?’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서는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이나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말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을 비워 자아를 죽이다시피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아가 우리를 ‘모기’, 혹은 요즘 유행하는 ‘좀비’와 같은 존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살리려는 마음을 자아내기에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종교적 세계관을 잘 나타낸 영화가 ‘웜 바디스’(2012)입니다.
좀비 영화이지만 인간을 세 종류로 표현하였습니다.
좀비이지만 아직 심장이 따듯해질 가능성이 남아있는 존재들, 그러나 심장이 따듯해질 가능성을 잃고 영원히 피만 찾아 돌아다니는 ‘보니’가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은 좀비로 태어난 아이들을 보니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경쟁이라는 것 자체가 남을 이겨야만 살게 만드는 체계로 그 사람의 인생을 모기의 삶, 좀비의 삶으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교육을 통해 생겨난 대표적 인물이 히틀러입니다.
그래서 독일은 그런 교육을 버렸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수많은 사교육비를 들여가며 아이들을 좀비에서 보니로 만들어갑니다. 
 
아무튼, 이런 세계에 인간들이 연구하기 위해 들어오고, ‘알’(R)이라고 하는 한 좀비가 그녀 남자친구의 뇌를 먹고는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뇌를 먹으면 그 사람의 기억까지도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녀를 보니와 다를 바 없는 인간들로부터 살려내기 위해 생명을 포기합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며 인간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욕구를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타자의 생명을 먹어야만 합니다.
생존은 타자의 생명으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본성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그런데 이 자아의 욕구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이다시피 할 수는 있습니다.
바로 더 높은 수준의 누군가를 받아들임으로써입니다. 
 
좀비였던 ‘알’이 한 인간을 사랑하여 그녀를 살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됨으로써
더 높은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김상운씨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에는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한 여인이 심한 두통으로 직장까지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의사들의 처방은 진통제와 수면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용량은 갈수록 증가했고 그렇게 삶을 더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분이 이것을 치유한 것은 약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가 만난 한 의사는 약물 대신 명상을 시켰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머리 안에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고통 덩어리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머리는 그것으로 가득 차서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나의 머리가 1m로 커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다음은 10m, 다음은 이 도시만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지구와 온 우주 크기만큼 커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명상을 매일 조금씩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달 뒤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이유는 우리를 품기 위해서였습니다.
팔을 벌려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 다시 말해 모든 시간과 공간 안의 인간들을 품으십니다.
원하면 누구나 그분의 사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자아를 죽임은 곧 타인을 받아들임과 일치합니다. 
 
저희 영성관 앞에도 작은 야산이 있습니다.
그 속엔 많은 뱀이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성관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아가면서 거의 뱀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뱀과 그만큼 떨어져 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곳에 사는 뱀은 더더욱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넓어지면 자아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는 사이 그 뱀과 나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이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도 하시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고도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같은 말입니다. 
 
한 자매님이 아직 아기인 딸과 어떤 강좌를 듣기 위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딸이 너무 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업고 화장실로 갔습니다.  
 
딸의 울음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 두 손으로 귀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혈관에 흐르는 맥박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습니다.  
 
자기 안에서 밖으로 조금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뻐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넓혀 아이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살게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나를 넓혀 마치 노아가 좋은 동물, 나쁜 동물 가릴 것 없이 자신의 방주에 태우는 것처럼 내 안에서 더 많은 사람이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도 들어오십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넓힌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비의 가장 중요한 면일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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