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가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루가 8,2)로 나타나고 있고,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들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으며(참조: 요한 19,25),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마르 16,9-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선종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마르세이유 근처에 가면 막달레나 동굴이 있다. 그곳이 막달레나 성녀가 거처하시며 기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성녀의 손을 잡고 하늘에 오르시면서 성녀를 그곳에 내려 주셨고 성녀는 그곳에서 관상과 기도로 일생을 바치셨다는 전설이 있고, 지금도 그곳은 성지로 꾸며져, 잘 보존하고 있다. 아마 성녀를 공경하던 사람들이 모여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복음: 요한 20,1-2.11-18: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녘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자기위주의 눈물 때문이었고,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빈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에만 그의 생각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마디로 “선생님!”하고 기뻐한다.
이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즉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 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 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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